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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대자보 |
지난 6월 9일 월요일 유시민은 '6월항쟁 정신계승과 범개혁신당 창당을 위한 심포지엄' 에서 "개혁신당의 이념과 정책노선" 에 대해 글 하나를 발표했다. 이 토론글은 개인의 자격으로 발표했으되 창당 논의의 핵심 멤버의 주장을 담음으로 인해 정치적 효과를 노린 공적 문서로서의 자격을 획득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매 시간 단위로 변하는 신당 논의의 정치적 풍향은 정확히 예측키 어려운 일이지만 창당 주역이 쓴 이 글로 인하여, 추진중인 신당의 이념적 성격과 정책방향성이라는 정체성이 비교적 명확히 제시되었고 이제 우리는 본격적으로 신당에 대해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검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에서 나는 유시민이 제시한 순서대로 주요 논제를 따라가며 분석, 비판하고자 한다. 이것은 실증적 비판의 형식을 가능한 한 따르도록 유념하였다. 다만 충분한 증거제시를 조건으로 그의 글의 행간과 마음의 이면을 읽는데도 같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다시 말해, 실증 제시와 증명을 논리학적 패러다임으로 규명하도록 하였다.
유시민, 개혁신당의 이념과 정책노선-'6월항쟁 정신계승과 범개혁신당 창당을 위한 심포지엄' 발표문-(2003. 6. 9)
신당 창당 논의에서 그 허위성이 시민 일반에 의해서 대부분 폭로되고 있는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들간의 의사 소통과 크게는 여론의 흐름을 결정하는 중대한 영향력을 발휘함에도 불구하고 토막난 정보가 아닌, 창당 주역이 문서로서 주장한 그들의 공식적 입장에 대해서는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적나라하게 비판한 글이 없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만약 이 시도가 성공적이라고 인정될 경우 그것은 유시민 개인의 논리의 허구성을 폭로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신당 추진 세력 전체의 비논리와 비정당성을 증명하는 셈이 될 것이다.
창당논의는 이 순간 수많은 민중의 삶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치 현안인 바, 이러한 비판의 작업을 한시라도 늦출 수 없는 형편이다. 진정한 진보개혁 진영에서 이들의 정체와 논의의 실상을 더욱 치열하게 비판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이 글의 오류를 발견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통하여 더욱 완벽한 반 신당 세력의 논리로 개발하는데 많은 논객들이 힘을 보태주시길 바란다.
이념적 좌표
유시민은 신당이 이념적 좌표 설정에서 보다는 정당구조, 운영원리, 조직문화 등에서 차별화 된 참여형 정당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이 말에서 문제는 '정당의 <제도 개혁>이다'라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면의 뜻은, <이념>의 차이는 어차피 별반 차이가 없으니 우리로선 신경쓰지 않는다, 라는 속내의 표현이다. 즉, 이 말은 한/나/라/당(강조표시, 필자주)과 민주당, 개혁국민, 삼당 간의 차이가 없다라는 그의 인식임과 동시에, '한나라당 의원들과 손잡는 것이 바로 이념적 지향의 퇴보를 결과하는 것도 아님'을 이해해 달라는 그의 변명이자 설득인 것이다. 그것은 한나라당을 직접 언급하기를 피하면서도 그들과의 차별성을 허무는데 일조하는 교묘한 캄플라지(변명)이다.
개혁을 주장하는 자들이 어떻게 이념의 의미를 축소, 왜곡하여 해석할 수 있는가? 한나라당의 이념과 민주당의 이념이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말인가? 둘 다 구분없이 중도보수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들의 정강에 적힌 내용이 대동소이 하다고? 만약 그렇다면 이들이, 한나라당이 주도하는 정국을 굳이 뜯어고치겠다는 그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만 하는가? 개혁을 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시 생각해보라. 애초에 개혁의 명분은 그들이 극우집단이다 라는 기본 이해에 기초해서가 아니었던가?
유시민은 보수와 진보정당간의 차이점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창당 추진 중인 신당은 이념적으로 현 민주당의 중도보수보다는 좀 더 평등과 사회정의라는 가치에 치중하는, 소위 개혁적 지향성을 갖는 정당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이념적 좌표는 이 정도면 참으로 알기 쉽게도 명료하다. 이 얼마나 듣고 보고 싶었던 정당의 모습인가! 이 주장과만 같은 정당의 탄생이라면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는 자기 말을 일거에 뒤집고 만다. 바로 다음 줄이다. "개혁당의 이념적 좌표가 모호해 보이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자기가 설명하고 설득한 신당의 이념적 좌표가 모호하다며 자진하여 제 주장의 무게를 내리깎고 있으니 이 무슨말인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어서 유시민은 변명한다. " 그것을 명료하게 정리하는 데에는 향후 개혁신당 추진주체들 사이의 깊은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념적 좌표 설정에서의 모순
앞에서 신당의 이념적 좌표와 지향점을 장황한 설명을 통하여 명확히 밝혔음에도,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스스로 그것이 불분명한 개념이라며 폄하했다가, 이윽고는 이 이념은 얼마든지 변하거나 조정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신당 추진주체들간에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라고 최종 입장 정리를 하고 있다. 가만 보면 유시민의 속내를 참으로 밝히 조명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다음 몇가지를 간추릴 수 있다.
첫째, 이것은 추진주체가 누군지도, 누가 될건지도 아직 정해지지 않은 사실에의 인정이다. 주체가 채 정해지지 않은 창당논의라면, 그 단계가 지금 과연 어디까지 왔는가에 대해 궁금해야 할 이유도 없이 먼저, '창당은 왜 필요한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마저 나오지 않았다는 실토가 되고 만다. 유시민은 이렇게 중요한 논점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논의하지 않고 너와 내가 다 알고 있는 일이라는 양 말없이 넘어가고 있다. ('왜 그가 이 논의를 회피하는가' 라는 점은 뒤에서 논의할 것임)
만약, 창당의 필요성과 당위성은 한참 전에 합의가 돼있는 사항이다라고 굳이 주장한다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는 의문점이 생긴다. 즉, 창당의 당위성이 입증됐다면 왜 주체적 그룹을 만드는 일이 지지부진 해야만 하는가, 이다. (신당 논의가 지금 몇달 째인가!) 이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속사정을 읽을 수 있다.
둘째, 사적 이해관계로 '일시' 소집되는 집단이다라는 뜻이다. (아직 소위 범개혁 정당, 재야 세력의 누가 참여하겠다는 건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명분과 가치추구를 위해 뭉친 집단이 전혀 아니라는 반증이다. 굳이, '창당의 당위성에 공감하여 뭉쳤지만 아직 주체세력은 없다' 라고 둘러댄다 하더라도 그 의미는 결국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창당의 당위성이 입증받고 있지 못하거나, 아니면 헤게모니 싸움이 개입돼 있다는 얘기다. 그들이 사적 이해 추구를 함에 있어 서로간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는 말이다. 가치를 중심으로 모이지 않고 사적 이익 추구의 기회를 찾아 모인 집단이라면 당연히 단체의 최소한의 영속성도 기대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그들은 서로 쉽게 갈라질 수 밖에 없다. 국민이 원하는 정당 개혁 개념은 이와는 달리, 영속성을 담보하는 근원적 개혁임을 그들은 외면하는 것이다.
세째는 추진주체들의 <이념>이 제각각이라는 사실의 시인이다. 유시민 자신이 원하는 신당의 이념적 좌표가 큰 동의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인정이다. 그런데도 그는 여기에서 자신의 주장과 다른 대체 가능한 이념에 대한 가설과 그 설명을 일절 생략하고 있다. 그는 "개혁신당의 이념적 좌표 : 개방적 민주주의" 라는 소(小)주제 아래 5분의 4의 지면을 할애하여 각 이념과 신당의 목표 이념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또 다른 몇가지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직 검토 대상으로 남아 있음에 대하여 당연히 언급했어야 한다.
이념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당을 만든다면 그 당이 어떤 모양을 띌 건지는 유시민의 시인한 것처럼 알 수가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왜 신당의 이념과 지향성을 상세히 제시하고 아예 단정까지 하며 이해와 지지를 부탁하고 있는가? 모순 덩어리이다. 그러면서 변명하기를, 이념을 선명하게 규정할 경우 범개혁세력의 결집에 장애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내부 이견의 표출을 자제할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자가당착에 대한 이해를 감히 구하고 있는 것이다.
끝부분을 대단히 솔직하게 적고 있다. 신당참여 구성원의 이념적 지향이 잡탕밥그릇이라는 것이다. 그 잡탕밥에는 이들이 눈독들이는 한나라당 출신의 잠재적 동참자가 들어 있다. 그는 지지자들에게 짐짓 당부하고 있다.
< 잡탕은 잡탕일망정 우리의 지향점은 같아요. 그러니 너무 적나라하게 까발리지는 말아주세요>란 사정의 말이다. 놀라운 발언이다. 이념이 다른 한나라당의 의원들까지 구애하여 함게 뭉치는데, 추구하는 지향이 같다니! 그들의 목표란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목표가 과연 얼마나 항구적이고 근본적인 가치이며 이 시대의 숙원이겠기에 정치인의 정체성이 되는, 이념이라는 근본적 차이를 뒤로 밀쳐 두고 우선 뭉치고 보자는 것인가?
보수당 개념의 왜곡
여기에서 유시민의 이념과 현실 정치 정당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 타협적 인식의 단면을 확연히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한나라당과 자민련을 보수당으로서 대접하고 있다. 반민주 반민족 반통일 친재벌 친수구언론 군사파쇼의 적자라는 정치적 정체성을 무려 40년간 고수하는 집단에 대해 보수정당이라는 최상의 헌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과거 범죄행위를 두둔하는 제2종 면죄부다.
이들은 보수일 수가 없다. 그들이 보수하는 가치라는게 도대체 있는가? 이들은 사회의 최상층부 권력만을 탐하고 그를 위해 전 민중의 피와 땀을 강요해온 극우집단일 뿐이다. 그들이 건전한 보수로서,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이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정책을 시행한 적이 있는가? 관의 엄청난 특혜 제공으로 초재벌을 육성하고 그들과의 유착을 바탕으로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며 중소기업의 공정한 경쟁과 육성을 제도적으로 억압하는 한편 서민과 노동자의 고혈을 빨아왔던 군사독재정권의 법통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정당을 어찌 보수정당이라고 불러줄 수 있는가? 아니면 혹 그는 한나라당이 군사정권의 맥을 완전히 끊고 새로 태어난 건전 보수라고 보는 것일까? 어불성설이다. 그들을 파쇼집단이라 불러주는 게 지극히 공정한 일이다.
만일 그가 보수정당이라고 칭하기를 굽히지 않는다면 그럼, 파쇼정권에 대항해 싸워왔다는 그의 자랑스런 과거는 무엇이었는가? 커다란 착각과 판단의 오류에 의한, 젊은이로서 한 때 부려보는 치기의 행위들이었나? 그는 왜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어야 만 했나? 군사파쇼가 아닌 건전 보수정권에 대항했었다는 얘긴가?
한나라당을 극우집단이 아닌 보수정당으로 매김해준 데는 그의 매우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더구나 그는 '보편적이고 학문적으로' 용인되는 방식을 통한 이념 분류를 설명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한나라당을 보수정당으로 분류하여 끼워넣으므로써 마치 그것이 공인된 사실인 양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마술의 손에 의해 한 점 의심을 살 수 없는 '공인된' 분류에 따라 한나라당은 어느새 보수정당으로 자리매김 되어있는 것이다.
설마 그가 보수의 뜻을 모르고, 한나라당의 정체성을 잠깐 까먹어서 그랬겠는가? 그의 의도는 바로 그 극우집단의 정체를 덮음으로써 그 곳으로부터 빼 올 수 있는 잠재적 참여자의 이미지를 최대한 윤색하자는 데 있다. 그 몇몇 당사자의 이미지를 아무리 미화시켜봤자 수구꼴통집단에서 온 손님이니 냄새를 다 제거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의 출신 배경부터 그럴듯한 프랑스풍 양옥집이 되게 만드는 거다.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선 역사적 사실도 멋대로 뒤틀어 끼워 맞추는 것이다.
이런 왜곡이 유시민의 머리에서 나오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아직도 곤혹스런 일이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정책노선
이어서 유시민은 신당의 정책노선에 대해 논한다. 즉, "개인의 자유와 자주적 선택을 저해하고 억압하는 평화를 지향하는 정당, 햇볕정책을 계승한 평화번영정책을 확고하게 지지하며 핵문제 등 한반도의 현안문제를 해결하는 데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는 데 결연하게 반대하는 정당, 약자를 위한 사회적 연대를 지향하고 기회균등을 위한 정책개발을 하는 정당이 되겠"노라고 말한다.
참으로 원대하고, 나 역시 그곳에서 열외 받고 싶지 않을 그런 멋진 사회를 구현하겠단다. 꿈의 정당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의 말을 가슴으로부터 믿을 수가 없는 것일까? 이제 그의 진정성의 여부는 그만 논하기로 하자. 그만하면 충분했다 싶으므로.
창당의 당위성의 허구
대신 그의 억지 주장, 즉 논리의 모순을 구경하기로 하자. 지금까지 신당의 이념적 좌표와 정책노선을 논의 했으니 이젠 현실적으로 <어떤 절차를 밟아 그러한 정당을 탄생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선, 사실상 가장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논의의 첫머리에서 완전히 무시하고 건너 뛰고 말았던, <신당의 당위성은 무언가?> 에 대한 치밀한 의견개진이 필히 전개되어야 마땅할 일이다. 신당이 필요하다고 구호처럼 외칠 것이 아니라 어떤 당위성이 있는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할 것이다.
당위성이란 신당을 만들어야만 하는 '필연성과 정당성'의 동시적 충족이다. 다시 말해,
1) '오직' 그 신당만을 통해서 위에 언급된 정당의 정책구현이 가능하고
2) 이러한 창당의 시도와 노력이 모두 '정의로운' 일임이 일반에 의해 합의되고 용인돼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 절차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한다. 절차 자체가 비민주적 반개혁적 폐쇄적 비공개적인 방법의 총동원이라면 신당의 의미란 건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다. 자, 그럼 유시민의 논의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의 주장의 두번째 마지막 부분이다.
"개혁신당은 신중도개혁 또는 자유주의적 개혁노선에 입각해 전국적 지지기반을 획득하는 정당입니다. 지역주의 정치지형을 허물고 국민통합을 이루는 정당입니다. 개혁신당은 기존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확보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정당이 아니라 민주당을 대체하는 정당입니다."
여기엔 절차도 당위성도 언급되지 않았다. 희망사항으로서의 신당의 미래를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글의 마지막 주장이다.
"중도개혁 노선을 가진 정당이 영남에서 단 하나의 의석도 얻지 못하는 현재 상황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이며 개혁신당은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을 종식시키고 보수, 개혁, 진보정당이 각자에게 합당한 전국적 기반을 가질 수 있도록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주역입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절차에 대해서는 침묵이다. 그러나 당위성을 주장하는 말이 나온다. 선언적으로 매우 간략하게 축약하여 주장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당위성은, 영남에서 한 의석도 얻지 못하게 돼 있는 비정상의 상황은 당연히 타파되어야만 한다는 정당성을 담보하며, 동시에 전국적 정당이 탄생할 수 있는 기반 조성이라는 필요성 때문이라고 한다. 독자는 여기에서 잠시 한 호흡을 내쉬기를 권한다.
신당 창당의 당위성 즉, 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신당 창당을 무엇을 위하여 (목적) 꼭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왜 이렇게 단순하게 언급돼 있는지 좀 으아스럽지 않은가? 아니, 오직 유시민의 이 글 만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어느 신당 추진 주체자의 입에서 이보다 더욱 상세하게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는 시도를 본 일이있는지를 기억해보시기 바란다. 내내 이 주장의 변주였을 뿐이라고 본다. 이 정도가 오히려 비교적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한 축에 속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여기 언급된 것 외에는 주장할 것이 더 이상 없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주장이 신당창당의 당위성을 언급한 진수라고 인정한다.
영남에서 한 석도 건지지 못하는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필히' 신당을 만들 수 밖에 없노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신당을 만들어야만 영남에서 몇석이라도 건지며 동시에 전국적 기반을 마련하는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가?
신당을 창당하는 목적은 당연히, 새로운 정책정당으로 태어나 정치 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설정됐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선 영남에서 의석을 얻을 수 있는 정치 환경을 만드는 것이 신당 창당의 목적이 된다. 찬찬히 살펴볼 일이다.
신당 창당의 목적은, 신당 그 자체로서 바람직한 정책정당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 전혀 아니고, 그러한 정당으로 만들어지기 위한 이전 정지 작업이다라는 뜻이다. 이 말에는 메워야만 할 커다란 멘홀이 열려있다. 유시민이 말하는 신당창당의 당위성이 인정을 받으려면, 창당 자체에 의해, 전국정당으로 태어날 정치 지형이라는 조건이 자연히 구성될 수 밖에 없다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창당으로 인하여 총선에의 승리는 따논 당상이 되어야만 한다는 전제다. 창당을 했어도 총선에서 다수당으로 승리하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건가?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예 논의 자체를 회피하는 거다. 어떤 논리와 믿음으로, 창당 자체가 총선의 승리를 보증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아니, 무슨 배짱일까? (논리가 없으므로 막무가내 배짱이라고 불러줄 수 밖에 없음을 어찌하겠는가?) 이것은 온 국민을 볼모로 잡은 세기의 도박이다.
창당만 하면 총선에서 승리하고 결국 정치 개혁에 박차를 기하게 된다라는 논리야말로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무협영화에다 콧방귀를 날리는 황당무계 그 자체다. 창당이라는 국가의 중대 이슈가 이렇게 논리없이 무대뽀로 질주해도 되는가?
다시 정리해본다.
이들의 창당은 그 탄생시킨 정당을 통하여 올바른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국정당으로 날 수 있는 조건 확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창당은 자체로서 목적이 아니고 도구인 것이다. 만약 이 신당이라는 무기(도구)로 대선이라는 과녁을 맞춰내지 못하면 창당의 최종 '목적'인 전국정당화를 이루지 못했으므로 창당의 의미 자체를 싸그리 잃고 만다. 그 신당의 운명은 당연히 공중분해로 귀결되고 만다. 그 엄청난 소모전과 정국혼란과 민생의 방치와 개혁진영의 분열을 댓가로 지불하면서 만들어진 이 신당의 운명이 공중분해로 종말을 맞고 말 확률은 아무리 인색해도 50 % 이상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짱이 남다른 사람들은 10%가 됐든 50%가 됐든 그건 네 말 장난이니 이왕 한 번 밀어부친거 끝까지 가보자며 우기고 말 것임을 잘 안다. 전국정당이 혹시 못되더라도 개혁적인 정당을 하나 만드는 것이 뭐가 나쁘다는 것이냐며 따질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아래의 논의를 안할 수 없다.
비윤리성
정작 이 창당논의의 심각한 문제점은 위에서처럼 확률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은 창당논의의 비윤리성, 비정당성, 즉 사기성의 문제다.
첫째, 논의 방식의 부도덕성이다. 창당이란 이슈에 관심을 갖는 대부분의 시민들로 하여금, '도구성'이라는 신당의 목적과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연막으로 가리는 행위다. 즉, 유시민의 위장술에서 보듯 창당의 논의에서 신당의 장미빛 정책과 노선만을 강조하며 반복 제시하므로써 창당 자체가 곧 정치 개혁이란 목적을 이루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창당에만 성공하면 마치 자동적으로 전국정당이 되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는 점이다. 또한 당연히, 신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은폐하므로써 아예 지불해야하는 손실의 댓가가 얼마나 엄청날런지에 대한 논의 자체를 차단시키고 있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둘째,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서, 영남패권주의에서 비롯한 영남표 확보 주장의 비도덕성이다. 유시민의 주장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중도개혁 노선을 가진 정당이 영남에서 단 하나의 의석도 얻지 못하는 현재 상황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이며 개혁신당은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을 종식시키고 보수, 개혁, 진보정당이 각자에게 합당한 전국적 기반을 가질 수 있도록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주역입니다."
유시민을 비롯한 신당 주체 세력 그리고 모든 일반 시민 동조자들은 이 주장이 도덕적으로 아무 흠결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유시민은 이 진술에서 사실상 도덕적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신당창당의 당위성 확보를 위해 도덕적 정당성을 선언함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시민(창당에 호의적인) 은 아무 의심없이 당위성을 추인하고 만다. 왜냐면 '그것이 거짓일까'에 대한 의문이 그 확고한 의지의 '선언'으로 인하여 아예 제거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에 근거하는지, 따라서 부도덕을 도덕인 양 위장하여 명분을 점유하므로써 지지를 얻어내겠다는 속셈이 얼마나 비윤리적인 짓인지를 하나씩 살펴보자.
유시민의 선언이 도덕적으로 무리가 없으려면 다음과 같은 전제가 필수적이다.
하나 :현 정치 지형이라는 조건으로 인하여 영남인들이 사회에서 부당하게 소외되고 있거나, 아니면 영남에서 의석을 못얻는 그 정당은 부당한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라는 전제다.
하나 : 비전국적 정당의 존재 자체를 역사적 결과물로 보지 않고 인위적이고 조작의 결과로 인식한다는 전제다. 이 논리의 연장으로, 태생적 원인을 불문하고 전국적 정당은 비전국적 정당 보다 도덕성에서 우위라고 보는 전제다.
하나 : 신당이 출현할 경우 자연스레 개혁, 보수, 진보의 각 지지층이 전국에 걸쳐 골고루 분포하게 된다는 전제이다.
영남은 피해자인가?
위 전제들의 허구성을 간략히 논증하련다. 한 정당이 영남에서 의석을 못건짐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피해 당사자는 그 정당 자신인가, 영남주민인가? '영남인이 특정 정당에게 표를 던지지 못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제약이 피해를 유발하는 조건이다', 라는 주장은 지나친 대(對)영남온정주의에서 나온 부풀리기다.
그것은 구조적인 제약이 아니고 관습을 마치 구조처럼 보이게 할 만큼 그것을 오랜 기간에 걸쳐 고착화시킨 영남인들의 선택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선택이란 애초 호남인에 대한 지역차별과 전 기층민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사회의 경제적 과실물을 가장 광범위하게 누리도록 제도화 한 과거 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지했던 역사적 사실을 일컫는다.
어떻게 그 관습을 허물것인가? 그들 스스로여야 하는가? 제3자가 나서서 아예 원천적으로 그들의 관습을 허물어뜨려 주겠다는 시도가 정당한가? 후자일 경우, 이것은 영남 상전 모시기에 다름 아니다.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 변하지 않는 조건에서 그들의 표를 얻겠다는 전략으로 그 어떤 제도를 만든다 한 들, 그들의 취향에 영합하는 후보를 내지않는 이상 원천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그러니 영남의 문제가 마치 구조적 제약에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어떠한 구조적 조정을 한다 한 들 치유될 수가 없다.)
이들의 구조적 제약이란게 기껏했자 이거다. 즉, 호남을 비토하는 영남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호남당' 후보 밖에 제시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영남인으로서는 선택을 제약당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라는 점이다. 이 따위 이유가 원천적 혹은 구조적 제약이라 일컬어진다. 이러한 사고는 전형적인 영남패권주의다. 영남인에게는 그들 스스로가 극복해야할 관습의 한계가 있을 뿐이지 호남당이 덧씌운 구조적 제약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호남탓으로 모는 것은 적반하장의 영남패권주의적 사고다. 이런 사고에서 정의는 완전히 실종되어 있다.
수구 성향의 영남유권자의 표를 얻으려면 수구성향의 후보로 호소할 수 밖에 더 있겠는가? 영남인이 개혁적 후보를 지지하고 싶어도 그 후보가 호남당에 있기 때문에 표를 얻지 못한다고 보는가? 이 말 자체가 모순이다. 호남당이라는 이유 때문에 표를 줄 수 없었다는 것은 이미 그 표가 수구임을 뜻하는 것이고 그 표는 역시 수구성향의 후보를 향할 일이지, 결코 개혁성향의 후보에게로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구영남의 표가 개혁후보에게 간다는 말은 억지 망발이다. 수구영남표는 수구한나라당으로 가든지 아니면 신당의 수구후보에게로 갈 것이다. 만약 신당에서 개혁 후보를 낸다면 (영남에서 개혁후보를 내어 이기겠다는 전략을 구사하는 신당의 선거위원장은 틀림없이 돌대가리일 것이다!) 영남표는 그에게로 가겠는가?
결론은 마찬가지다. 수구영남의 표를 얻으려면 수구성향의 후보를 내야 할 것이며 그러한 후보들의 집합이 된 정당은 개혁은 커녕 수구정당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 창당주역들은 이 사실들을 캐무플라지하고 오히려 거기에서 도덕성을 획득하려 한다. 이런 위선을 부리는 창당 주체들의 도덕성은 이토록 바닥이다.
역사적 인과성 무시
두번째로, 지역 편중적인 정당의 존재 원인을 역사성에서 찾지 않고 그 생성 과정의 인과성을 아예 무시한다는 점이다. 즉, 이 전제는 현 정치 지형을 조건짓는 원인이 지역에 따른 보수와 수구의 편재를 고착화 시킨 역사적 유래에 있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주장이 된다. 민주당은 민주화를 위해 싸운 호남 출신 정치인들과 지역차별에 희생당해온 그곳 주민들을 중심으로 맥을 이어왔다. 한나라당은 영남을 근거지로 한 군사독재 정권과 그곳 영남의 수구화된 주민들의 지지를 주 기반으로하여 명을 이어왔다. 이들이 정당선호의 편중성을 보이는 것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 편중성은 지극히 비정상적으로 '보일' 뿐 '비정상적 현상'은 아니다. 비정상은 그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을 배태한 역사다.
그러면 현상을 타개하는 방법은 무언가? 당연히 역사의 물꼬를 되돌려 놓는 일이다. 즉, 인위적인 외과적 수술이 아니라 내적 치유의 길을 찾는 일이다. 영남인들에게서 호남당 비토라는 뿌리깊은 문화를 자발적으로 부수고 되돌리도록 돕는 수 밖에 없다. 인위적인 방법으로써, 영남인에게 호남색을 탈색시킨 수구후보를 내세울 경우 영남은 수구가 저지르는 역사적 죄과를 깨닫지 못하고 영원히 수구로 남을 것이며 그들은 호남에 대한 패권주의를 끊는 노력 자체마저 중단하고 말 것이다.
하물며 호남이미지를 탈색해야지만 영남표를 얻을 수 있으니 호남인이여 당분간 희생해 달라,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 그들의 측정할 길 없는 이기주의를 확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호소의 언어에는 '영남인들은 너희들이 싫단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냐!' 라는 차별주의가 팔팔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위적 처방은 지역갈등의 치유의 기회를 영영 빼앗고 말 것이며 동시에 영남패권주의를 정당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정치 지형 해석에의 왜곡
세번째 전제, 즉 "개혁, 보수, 진보의 각 지지층이 전국에 걸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는 그 자체로서 거짓이다. 왜냐하면 신당의 출현으로 인하여 수구영남인이 갑자기 개혁으로 돌아서고 동시에 개혁호남인이 그날을 기점으로 서서히 한나라를 지지하는 극우보수가 되고 말리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궤변의 극치인 이 전제가 유시민이가 말한 신당 창당의 당위성 증명을 위해서는 필수사항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전제 자체가 오류이므로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만들어진 논제는 이미 오류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자연히 밝혀진거다. 이것은 오류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는 거짓이다.
절차-영남패권주의
마지막으로 유시민의 창당논의 중 그 부도덕성을--개인적 부도덕성이 아니라 유시민으로 표상되는 신당추진세력의 모든 논의와 행위가 갖는 비정의, 그리고 당위성의 결여--드러내는 것은 신당 창당의 '절차'의 비민주성과 폐쇄성이다.
민주당을 해체 또는 파괴하고 분당한 뒤 소위 범개혁세력을 결집하여 전국정당으로 태어난다는 명분 역시 같은 논리로 모순의 극치임을 보인다. 어떤 미사여구와 논리를 갖다 붙여 위장하더라도, 수구영남이라는 유권자가 그대로 있는 한 전국정당으로 태어나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념에 따른 정책 정당으로의 구조 개편을 하여 보수, 개혁, 진보 의 각 정당이, 그 지향하는 대로의 계층과 이념을 가진 유권자 지지를 얻으므로써 지역적으로 편중되지 않는 정당들로 태어나게 만든다는 주장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전국에 골고루 산재돼 있는 기층민의 지지를 받아 진보정당이 전국정당이 되고, 마찬가지 논리로 보수 정당과 개혁정당이 각각 전국정당이 될 수 있다라며 대안처럼 믿고 제시하는 것도 대단히 순진한 생각이다. 수구영남의 유권자 개개인이 수구라는 관습의 족쇄에서 스스로의 노력과 결정에 의해 탈피하지 않는 한, 자신의 사회경제적 소속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겠다는 정당마저 외면하고 관습적 친척관계인 수구정당을 결국 지지하고 마는 행태는 끝내 지속되고 말 것이다.
이 관습은 이미 긴 기간 동안의 정당화 과정을 거쳐 '문화'가 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영남패권주의 사고가 자연의 이치처럼 너무 자연스러운 문화로 굳어져 이미 의문 제기의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 이 문화적 이데올로기는 너무도 자연스러우므로 스스로는 전혀 자각할 수 없다. 그것은 영남인 개인의 인식 철학 이념 사상, 즉 사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 모두를 초월해 있다.
한 개인이 자신 안에 내재한 영남패권주의 문화를 자각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극복됐다고 선언하는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는 유시민과 노무현을 보기만 해도 충분히 증명된다고 본다.
유시민
스스로 영남인인 유시민은 영남의 호남차별주의를 집단정신병이라고까지 규정한 바 있다. 그는 지역감정이란 그저 말장난일 뿐, 사실은 영남인의 호남혐오증이 진실임을 꿰뚫어 본 바 있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위에서 논술한 영남패권주의의 산물인 신당논의의 주역 노릇을 하고 있다.
신당 창당의 명분의 핵심은 지역주의 정당 극복이며 인적 청산은 그를 위한 보조적 수단이다.
지역주의 정당 극복이란 화두에 어떤 철학이 들어있는가? 이 개념에서 '소외 극복'이라는 의미를 빼놓고선 정당성을 운위할 수 없다. '그게 아니고, 정상적인 정치 문화를 태동,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라는 말로 포장을 한다 해도 그 안에는 역시 '소외 극복'이라는 가치를 담아야만 한다. 즉, 지역주의 정당 극복이란 어떤 소외 계층이나 소외 지역민의 존재를 앞에 전제하고 그것의 타파를 목표 삼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들이 일컫는 그 소외된 주민은 놀랍게도 영남인들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놀라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공포다. 또 하나 무서운 일은 영남인의 소외를 위무하기 위해 또 다시 호남인의 희생을 대신 요구하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영남인의 표를 얻기 위해 호남인은 민주당 지역구 의원 지지를 그만 철회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에의 공헌등의 전통을 잇고 있는 민주당을 그들로 부터 강제로 떼어내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후안무치, 궤변의 논리는 모두 영남패권주의의 문화로부터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그가 신당 창당의 목적을 글머리에 밝히지 않고 맨 끄트머리에 아주 간결하게 달고 말은 이유도, 역시 그 정당성을 상세히 논하면 논할수록 그 부도덕성과 논리의 모순됨이 한꺼풀씩 벗겨지고 말 것임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신당 창당을 도모하는 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필요하고 소중한 자산은 일반 대중으로부터 그것에 대한 지지를 얻는 일이다. 그럴 경우 여론의 향방에 민감한 정치인들의 신당 참여율은 자연 높아질 것이며 소기의 목적은 절로 달선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지지들 얻기 위한 설득 작업의 촛점은 바로 창당의 당위성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즉, 그것이 정의롭다는 점을 대중에게 납득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창당 주역들은 이 과정을 애써 무시한다. 대중을 상대로 설득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유시민의 태도처럼 말이다. 사실상 정당성이 없음을 그들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민주당은 죽은당이므로 바로 없어져야 한다는 극언을 한다. 한나라당은 살리고 민주당은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테러리스트적 공격성의 연원을, 그가 가진 영남패권주의 사고 말고는 해석할 길이 없다.
노무현
유시민만이 아니다. 지역주의 청산의 국민적 소명을 받고 선출된 노 대통령이 가진 영남패권주의 문화 양식도 우려할 만한 수준을 훨씬 넘어 있다. 유시민과 합일하는 코드를 공유하는 노무현의 지역패권주의 사고는 이미 신당 창당을 물밑에서 조종하고 있는 행태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되었지만 이번에는 그의 발언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기로 하자.
5월 28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이 말한다. "제도를 개편하든, 정당이 스스로 개혁하든 결과적으로 어느 한 지역에서 어느 당이 의석의 3분의 2를 독식하지 못하도록 또는 독식하지 않는 정치적 환경이 만들어지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중략) 이(현재의--필자 주) 지형 위에선 제가 다수당 위에 있더라도 지역의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지 않나요?"
노무현에겐,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선호하는 호남인의 압도적 지지에 결정적으로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된 사실을 회고, 검토하여 지역차별의 철폐라는 그들의 기대와 염원을 한 번 헤아려 봤을만 한 흔적이 없다.
자기 스스로, 대통령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역대통령'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호남에서 집중적으로 지지받았으나 영남에서 지지받지 못하였으니 '전국대통령'으로서는 부족하지 않느냐라는 자기 고백이다. 충격적인 고백이다. 반대로 그가 호남에서 외면당하고 영남의 표에 의해 대통령의 자리에 앉게 됐을 경우 이런 망발을 내뱉었겠는가를 예상해보라.
획득한 지지표가 전체적으로 더 많을 망정 영남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니 지역대통령이고 이래서야 어디 영남인들에게 대통령으로서의 영(?)이 서겠느냐라는 인식의 표현이다.
대통령이 됐으면 떳떳하게 대한민국 전체의 대통령이 돼야 할텐데 영남을 뺀 비영남지역 대통령의 자격밖에 사실상 못되는 거 아니냐는 자기비하적 망발이다. 이것이 그의 영남중심주의적 사고 방식이다. 다시 말해 영남패권주의다.
패권주의란 당연히 공격적인 것이어서 타인의 희생을 요구한다. 노무현의 이러한 인식은 대선에서 그를 지지했던 모든 유권자를 모독하는 것이다. 특히 그에게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걸고 압도적으로 지지한 호남인을 정식으로 능멸하는 짓이다.
자신을 대통령의 자리에 앉게 해준 지지자들의 표의 가치를 형편없이 평가절하하는 것 만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의 대통령으로서의 위신과 정당성에 대해서도 스스로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으로서의 정체성에 스스로 의심을 품는 대통령을 보는 것은 커다란 비극이다.
이러한 이유가 단 하나, 영남인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인식에 기인한다. 이 강박관념은 영남패권주의에 깊이 물들은 자의 사고에서 의식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찌꺼기이다. 영남패권주의의 뿌리는 이토록 깊고 그 폐해는 끝을 모른다.
창당논의의 절차상 비도덕성은 근본적으로 영남패권주의의 산물이다.
결론
신당의 이념적 좌표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는 이면의 동기에서부터 이념적 좌표 설정에서의 모순, 보수당 개념의 왜곡, 정책노선, 창당의 당위성의 허구, 창당논의의 비윤리성, 영남을 피해자로서 전제하는 둔갑술, 지역적 편중성의 역사적 인과성 무시, 정치 지형 해석에의 왜곡, 그리고 이 모든 왜곡과 비논리와 비상식의 근본 추동력으로 작용하는 영남패권주의에 대해서 까지 논증하였다.
이 글에서 사용한 텍스트는 겨우 유시민의 글이었을 뿐이라고 축소 해석하지 마시길 당부한다. 그의 글이 대표성을 띄고 있으므로 이것이 곧 신당추진세력 전체의 의사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다만 그들의 논의의 허구를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분석하겠다는 이 글의 목적상, 그의 글을 실용적 의미에서 텍스트로 사용한 것 뿐이다.
* 본문은 독자기고입니다. 본문에 대한 네티즌 여러분들의 다양한 의견을 환영합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