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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계를 깨고 나오지 않으면 더 큰 삶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

[나의 스토리]나의 작은 왕국 거제도

김정기 시티넷(아태지방정부네트워크) 사무국 대표 | 기사입력 2023/09/25 [08:41]

▲필자/김정기 시티넷(아태지방정부네트워크) 사무국 대표. ©브레이크뉴스.

거제도라는 섬에는 내 유년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차 있다. 검푸른 앞바다에 길게 드러누운 수평선, 멀치감치 바다와 마주하며 펼쳐져 있는 논과 밭, 산 구릉 위로 송아지 떼가 여기저기 흩어져 풀을 뜯는 나른함, 무엇 하나 파격적일 것 없는 이 한가한 일상이 내 유년의 풍경이다. 이 자그마한 왕국은 내가 십수 년을 사는 동안 그 울타리 밖을 꿈꾼 적이 없는 나의 보금자리였다.

 

나는 조선왕조 개국공신으로 계림군에 녹훈되고, 의정부 좌찬성(종1품/부총리)에 제수된 경주김씨 계림군파 김균의 22대손으로서 내 안에 싹튼 사대부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거제도라는 소왕국의 선민으로 살아갈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경기도 용인에서 경남 함양으로 낙향하셨는데, 아마도 조선시대 한양을 기준으로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빼어난 유학자가 많았기 때문이리라. 함양에서 유학자로 후학을 양성하셨던 할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나는 조선시대 엘리트인 사대부처럼 행동했고, 내 사고를 편협하게 가두기도 했지만 '나는 남과 다르다'는 선민의식을 갖고  함부로 살지 않겠다고,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겠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경찰 지서장을 지낸 아버지의 신분 덕분에 이웃과 동네  친구들에게 나는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정기야, 니 집에 가서 텔레비전 연속극 보면 안되나, 내일 니 가방 들어다줄게."

 

지서장 관사였던 우리 집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전기가 들어왔고, 근방에서 보기 드물게 목욕탕까지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있었다. 밤마다 동네 친구들이 우리 집에 텔레비전을 보러 오려고 내게 청탁을 할 때면 난 마치 세도가의 자손인양 우쭐한 기분이 되곤 했다. 더욱이 시골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경우로 도쿄 유학까지 다녀온 '소지식인' 아버지와 일본에서 출생하여 오사카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오사카 철도국에서 근무한 '신여성' 어머니 덕분에 200권이 넘는 장서를 갖춘 우리 집 서가는 동네 아이들의 문화적 휴식 공간으로 한몫 했는데, 내게는 그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1960년대 후진국 대한민국에서 지서장 월급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이웃에 비하면 우리 집은 현금 쓰기가 비교적 여유로운 펀이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과는 달리 검정 고무신 대신 운동화를 신을 수 있었다. 또 초등학교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면 기관장 자격으로 우리 학교 연단에 올라 인사말을 하는 아버지와  초등학교 육성회장을 맡은 신여성 어머니 덕분에 한 학년 세 학급에 전교생 1,000명이 재학하는 학교에서 나는 알게 모르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저 얘가 바로 지서장 댁 둘째아들이야. 공부를 아주 잘 한다네."

 

"1등은 맡아 놓고 한다더니, 정말 총명하게 생겼구만.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학교 대표로 웅변대회에 나가서 상도 받았다는데 뭘. "

 

내가 마을 거리를 지날 때면 동네 어른들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인근 마을로 놀러가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을 정도니 아버지가 관할하는 작은 영토가 나의 전 우주라고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사대부 후예로서의 자긍심과 아버지가 지서장이란 울타리가 주는 보이지 않는 후원과 지지 덕분에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내 실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손에 쥔 것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으니 여유가 있었고, 물러설 자리가 넉넉하니 늘 당당했다. 학교에서 공부와  글짓기는 물론 웅변에서도 일등이고, 축구대회가 열리면 주장으로서 우리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고학년이 되어서는 전교 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동네 아이들은 동네에서 구슬과 딱지와 팽이를 가장 많이 가진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친구들과 팽이치기를 할 때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불안하지 않았고 불안하지 않으니 집중이 잘 되어 '싹쓸이'는 언제나 내 차지였다. 여유 있는 마음으로 한 가지에 집중하는 사람을 당할 장사는 없는 법이다. 이때 얻은 당당함은 어른이 되어서도 비굴하지 않고 배짱을 부릴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드디어 내게도 이 익숙한 왕국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계기가 찾아들었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아버지, 서울 다녀오겠습니더. 여기저기 다녀볼 곳도 많고 구경할 것도 있구 하니 이번 방학에 저 혼자 서울거리를 익혀 볼랍니다."

 

"뭐 하러 고생을 사서 하나. 친척집에 신세를 지는 것도 미안하니  다음에 아버지랑 함께 다녀오자꾸나."

 

"아임니더. 저 혼자 충분히 다녀올 수 있습니더. 보내주십시오.

 

혼자  가겠다고 막무가내로 우기자 아버지는 "그럼 한 번 다녀오그라"하며 허락하셨다.

 

"까짓것  길 모르면 물어서 가면 되지 뭐." 

 

혼자 생각으로 차타고, 배타고, 기차타고 서울로 갔다. 그러나, 막상 서울역에  내리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살던 거제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도시의 풍경들이 온통 눈을 어지럽혔다. 분주히 오가는 수많은 인파, 이리저리 쏜살같이 내달리는 자동차 행렬, 하늘로 쭉쭉 뻗어오른 높은 빌딩들이 내 앞에 한가득인데, 아닌 게 아니라 '진짜 촌놈'이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그만 주눅이 들어버렸다.

 

여기가 저기 같고 거기가 여기 같은 서울역 거리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그런데 내가 물어보는 사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하고  다들 아무 말도 안 해주고는 그냥 가버리는 거였다.     연거푸 세 사람에게 길을 물었지만 다들 대답은 커녕 힐끗 쳐다보더니 그대로 가버렸다. 안 되겠다 싶어 마음씨 좋게 생긴 아주머니에게 달려갔다.

 

"아주머이, 관철동 갈러믄 어떻게 가야 합니꺼?"

 

"얘야, 숨 좀 쉬고 천천히 말해봐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아주머니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내 말투를  좀체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듯 난감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그냥 가버렸다. 갑자기 이 서울 하늘 아래서 내게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몰려들면서 주위가 온통 비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낯설고 이상한 나라에 와 있었다. 거제도라는 작은 왕국에서 푸대접이라곤 받아본 적  없던 내게, 부족함을 모르던 내게 서울이라는 거대한 공간은 평화롭던 내 유년의 왕국을 아주 보잘것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서울은 나를 기다리지도 않았고  더욱이 나를 위해 비워둔 자리 같은 건 애당초 있지도 않았다는 게 현실이었다. 모든 게 낯설고 우호적이지 않은 곳에서 그저 막막한 심정이었지만, 피해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계획한 일을 나 혼자 마무리 짓기로 했다. 찾아갈 곳은 약도를 그려 찾아가고, 내 말을 못 알아듣는 서울 사람들에게는 최대한 천천히 말을 건넸다. 그리고 '서울은 언젠가 내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꼭 다시 찾아와야 할 곳'이라는  생각으로 서울 나들이를 정리했다.

 

나는 그때 새로운 세계를 맛보았다. 내 작은 왕국의 울타리 밖에는 또 다른 세상이 아주 넓게 넓게 펼쳐져 있다는 걸 처음 안 것이다. 그곳은 내가 이제껏 살아온 거제도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서울에는 익숙한 조건들이 주는 자신감과 여유는 없었다. 나는 비로소 이런 현실에 눈 뜨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쯤은 아주 특별한 계기를 만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익숙해진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두려워서 새로운 희망을 꿈꾸지 않으려 한다. 유년기의 나는 거제도에서 많은 혜택과 안락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들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는 없었다.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게 된 이상, 나를 편안하게 해주던 것들이 이제는 낡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새로운 것을 선택하기 위해 나는 익숙한 것들을 버려야 했고, 익숙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했다. 이것들과 결별하지 않고서는 내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새로운 환경들을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주는 고향 사람들이 있고, '나는 남과 다르다'는 작은 만족에 좀더 오래 머물러도 좋을 그런  곳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어 정착했더라면, 내가 그 후에 겪게 된 젊은 날의 시련은 접어두고라도 앞길을 헤쳐가기가 좀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으로 들뜬 나는 안온한 인생보다는 성취할 게  많은 인생을 택하고 싶었다. 내가 인생에서 새로운 도약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면, 그리고 익숙한 삶의 조건들이 나의 변신을 방해하고 있다면, 나는 이제 이런 것들을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한다고 여겼다.

 

'익숙한 상식대로라면 답은 뻔하다, 무조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차피 미래가 불확실한 것이라면  그걸 뒤집어 생각하자. 결국 가능성은 도전하는 자가 일구어내기 나름이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과감히 뛰어들어 변화를 일으키고 발전하고 도약하는 거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가능성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가능하면 익숙한 것들로부터 더 멀리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맹자는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했는데, 한 세계를 깨고 나오지 않으면 더 큰  삶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우리네 삶 전체를 관통하는 말일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  김정기 시티넷 사무국 대표 이력

 

*학력

 

△뉴욕주립대(Stony Brook) 정치학과 수석 졸업(BA-Summa Cum Laude)

△마케트대(Marquette) 로스쿨 법학박사 (Doctor of Jurisprudence)

 

*외교안보 경력

 

△제8대 주 상하이 대한민국 총영사 (13등급 대사)

△2010 상하이엑스포 대한민국관 정부대표

△시티넷(아태지방정부네트워크) 사무국 대표

△국민대 정치대학원 동아시아국제정치 특임교수

△베이징대 외국어대학 북한학 객좌연구원

△베이징대 동방학연구원 중국학 연구교수

 

*경제경영 경력

 

△거로출판사 청년 창업자 및 회장

△한국예탁결제원 국제펀드위원회 자문위원

△법무법인 영진 중국경제금융센터 고문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석좌교수

△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용인) 객원교수

△한남대 경제학부 예우교수

△난징대 국제경제연구소 객좌교수

 

*교육 경력

 

△숭실사이버대 초대 총장

△성결대 교양교직학부 석좌교수

△용인대 교양대학 특임교수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외국어학당 영어강사

△서울대 행정대학원 국가정책과정 이수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최고위과정 이수

 

*법조법학 경력

 

△법무법인 대륙아주 중국총괄 미국변호사

△숭실사이버대 법학부 전임교수

△고려대 법학대학원 최고위과정 '고정' 강연자

△밀워키지방법원 판사시보

△미국변호사협회 ADR분과 위원

 

*뉴미디어 경력

 

△자유한국당 팟캐스트 <적반하장> 패널 및 앵커

△유튜브 채널 신의한수 <세계전망대> 정치평론가

△김정기TV <직필직설> 대표평론가

△인터넷 언론 브레이크뉴스 정치칼럼니스트

 

*정치 경력

 

△국민의힘 용인(병) 국회의원 경선후보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후보 정치행정분과 위원 및 선대위 정치개혁 총괄 자문위원

△자유한국당 오세훈 당대표후보 SH전략회의 총괄 및 선대위 조직본부 총괄본부장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후보 국제위원회 위원장 및 선대위 서울필승대회 준비위원장.

 

*저서

 

△대학생을 위한 거로영어시리즈[전10권](거로)

△나는 1%의 가능성에 도전한다(조선일보)

△한국형 협상의 법칙 (청년정신사)

△대한민국의 미래를 말하다 (도서출판 실크로드).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If you don’t break away from one world, you can’t move on to a bigger life…”

[My Story] My Little Kingdom Geoje Island

-Kim Jeong-gi, CEO of Citynet (Asia-Pacific Local Government Network) Secretariat

 

The island called Geojedo is filled with the scenery of my childhood. The long horizon lying in the dark blue ocean, the rice paddies and fields stretching out against the ocean, the languor of a herd of calves grazing here and there on a mountain hill, this leisurely daily life with nothing unconventional is the scene of my childhood. This small kingdom has been my home for over a dozen years and I have never dreamed of going outside its walls.

As a 22nd-generation descendant of Kim Gyun of the Gyerim-gun faction of the Gyeongju Kim Clan, who was awarded the rank of Gyerim-gun for his contribution to the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and was appointed Jwa Chan-seong (1st rank/Deputy Prime Minister) of Uijeongbu, I had pride in being a descendant of the noble family that had sprouted in me, and this was the chosen people of the small kingdom of Geoje Island. It has become a sufficient condition for living as a person. His grandfather moved from Yongin, Gyeonggi-do to Hamyang, Gyeongnam. This is probably because there were so many outstanding Confucian scholars that there was a saying about Hanyang during the Joseon Dynasty, ‘Left Andong, Right Hamyang.’ Following the teachings of my grandfather, who was a Confucian scholar in Hamyang and trained younger students, I behaved like a nobleman, the elite of the Joseon Dynasty, and narrow-mindedly confined my thoughts, but with the consciousness of being a chosen citizen and the belief that 'I am different from others', I did not live carelessly and thought that I would grow up to be a good person. did. Moreover, thanks to my father's status as a police station chief, I was always the object of envy among my neighbors and neighborhood friends.

“Jeonggi, can we go over to your house and watch a TV soap opera? I’ll carry your bag tomorrow.”

Our house, which was the official residence of the district chief, was the only one in the village with electricity, and even had a bathhouse, which was rare in the area. Above all, our house had a television. Every night, when my neighborhood friends would ask me to come to my house to watch television, I would feel proud, as if I were a descendant of a wealthy family. Moreover, thanks to my father, a 'small intellectual' who even went to Tokyo to study, which is rare in rural areas, and my mother, a 'new woman' who was born in Japan, went to a girls' school in Osaka and worked at the Osaka Railway Bureau, our home's library of over 200 books is stocked with children in the neighborhood. It played a role as a cultural resting place for , and I couldn't tell you how proud I was of that fact.

How much was the salary of a branch chief in Korea, an underdeveloped country in the 1960s? Compared to our neighbors who made their living by farming or catching fish, our family was relatively comfortable spending cash. So, unlike my friends, I was able to wear sneakers instead of black rubber shoes. Also, thanks to my father, who would go up to the podium and give greetings as the head of the school whenever there was a big event at the elementary school, and my mother, who was the president of the elementary school education committee, I became a special person in a school with 1,000 students in three classes per grade, whether I knew it or not. .

“This is the police chief’s second son. He studies very well.”

“I heard you took first place, and you seem really intelligent. You won the grand prize in the school’s writing contest, and you also won a prize in the speech contest as the school’s representative.”

Whenever I passed through the village streets, the local adults patted my head and praised me. Even when I went to a nearby village to play, there were many people who recognized me, so it was not unreasonable to think that the small territory under my father's jurisdiction was my entire universe.

Thanks to my pride as a descendant of the noble family and the invisible support and support given by my father as the head of the branch, I was able to demonstrate my skills to the fullest no matter where I did or what I did. I was relaxed because I wasn't worried about losing what I was holding, and I always felt confident because I had plenty of space to step back. At school, I was top not only in studying and writing, but also in oratory, and when soccer tournaments were held, I led our team to victory as captain. In my senior year, I was elected as student council president.

The kids in the neighborhood were very jealous of me because I had the most beads, labels, and tops in the neighborhood. When playing top with my friends, I wasn't anxious because I wasn't afraid of losing. Since I wasn't anxious, I was able to concentrate well, so 'sweep' was always my thing. There is no business that can beat a person who focuses on one thing with a leisurely mind. The confidence I gained at this time became the foundation for being courageous and not servile even as an adult.

But finally, I had the opportunity to escape the confines of this familiar kingdom. It was during summer vacation in my first year of middle school.

“Father, I am going to Seoul. There are many places to visit and things to see, so I will try to get to know the streets of Seoul by myself during this vacation.”

“Why should I go through all the trouble? I’m sorry for being dependent on my relatives, so let’s go with my father next time.”

“I’m there. I can go there on my own. Please let me go.”

When I stubbornly insisted that I go alone, my father agreed and said, “Then go sometime.”

“If you don’t know the way, just ask and go.”

I went to Seoul by car, boat, and train alone with my thoughts. However, when I got off at Seoul Station, my eyes widened. The cityscapes that could not be seen in Geoje Island, where I lived, were all over my eyes. There were countless crowds of people rushing back and forth, cars rushing here and there, and tall buildings stretching straight into the sky, all in front of me, but it wasn't that I was intimidated by the unfamiliar scenery that a 'real hillbilly' was seeing for the first time.

I couldn't figure out where to go on the streets of Seoul Station where here was like there and there was like this, so I asked a passerby for directions. But everyone I asked just tilted their heads and left without saying anything. I asked three people in succession for directions, but instead of answering, they all just glanced at me and left. I thought it wouldn't work, so I ran to the kind-hearted woman.

“Ma’am, how should I get to Gwancheol-dong?”

“Sweetheart, take a breath and speak slowly. I can’t understand a word of what you’re saying.”

The lady looked at me with a perplexed expression, as if she couldn't understand my strong Gyeongsang dialect, and then just walked away. Suddenly, the thought that no one was interested in me under the Seoul sky began to flood me, and everything around me began to feel heartless. I was in a really strange and strange country. For me, who had never been treated poorly in the small kingdom of Geoje Island, and who knew nothing about my shortcomings, the huge space called Seoul turned the peaceful kingdom of my childhood into something very insignificant.

In the end, the reality was that Seoul did not wait for me, and furthermore, there was no space left for me in the first place. I felt at a loss in a place where everything was unfamiliar and unfriendly, but I thought I couldn't avoid it, so I decided to finish the work I had planned on my own. I drew a map of the places I wanted to visit, and spoke as slowly as possible to people in Seoul who couldn't understand me. And I organized my trip to Seoul with the thought, 'Seoul is a place I must return to one day to make my dreams come true.'

I tasted a new world then. For the first time, I realized that there was another world spreading out so wide outside the walls of my little kingdom. It was a completely different world from Geoje Island, where I had lived so far. In Seoul, there was no confidence or leisure given by familiar conditions. I was finally starting to open my eyes to this reality.

We encounter very special moments several times in our lives. However, people do not want to dream of new hopes because they are afraid of breaking away from the things they are already familiar with. When I was young, I was able to enjoy many benefits and comforts in Geoje Island. However, such conditions could not last forever. Now that I can look at reality calmly, the things that made me comfortable now feel old and frustrating. I couldn't stay there any longer. In order to choose something new, I had to let go of familiar things and break away from familiar ways of thinking. This is because I could not encounter the new environments necessary to achieve my dreams without breaking up with these.

If I had graduated from school, gotten a job, and settled down in a place where there were people in my hometown who knew me and where I could stay longer with the small satisfaction of 'I am different from others,' I would have had a better future ahead of me, even putting aside the hardships of my youth that I experienced afterwards. It might have been easier to navigate. Excited with a desire for a new world, I wanted to choose a life with more things to accomplish rather than a life of ease. If I was at a point in my life where I needed a new leap forward, and if the familiar conditions of life were hindering my transformation, I thought it was time to boldly throw them away.

'According to common sense, the answer is obvious: it is absolutely impossible. If the future is uncertain anyway, let’s turn it around and think about it. In the end, isn't it true that possibilities are up to those who take on the challenge? That's because I thought, 'If that's the case, take the plunge, bring about change, develop, and leap forward.'

I struggled to get as far away from the familiar as possible to lay the groundwork for my potential. Mencius said that not moving forward is no different from going backwards, and the fact that you cannot move on to a bigger life unless you break out of one world may be a statement that permeates our entire life.

☆Author Kim Jeong-gi, CEO of CityNet Secretariat

▲▲Author/Kim Jeong-gi, CEO of CityNet (Asia-Pacific Local Government Network) Secretariat. ©Break News.

 *Education

 △Graduate from the Department of Political Science at Stony Broo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BA-Summa Cum Laude)

 △Doctor of Jurisprudence, Marquette Law School

 *Diplomatic and security experience

 △8th Consul General of the Republic of Korea in Shanghai (Grade 13 Ambassador)

△Government representative of the Republic of Korea pavilion at the 2010 Shanghai Expo

△CityNet (Asia-Pacific Local Government Network) Secretariat Representative

△Special Professor of East Asian International Politics, Graduate School of Political Science, Kookmin University

△Visiting researcher of North Korean studies, College of Foreign Studies, Peking University

△Research Professor of Chinese Studies, Institute of Oriental Studies, Peking University

*Economic management experience

 △Young founder and chairman of Georo Publishing Company

△Advisor, International Fund Committee, Korea Securities Depository

△Advisor, Chinese Economic and Financial Center, Youngjin Law Firm

△Distinguished Professor, Graduate School of Business, Dongguk University

△Visiting Professor, Kyung Hee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Techno Management (Yongin)

△ Honorary Professor, Department of Economics, Hannam University

△Visiting professor at Nanjing University Institute of International Economics

 *Education experience

 △First President of Soongsil Cyber University

△Distinguished Professor, Department of Liberal Arts and Education, Sungkyul University

△Special Professor, College of Liberal Arts, Yongin University

△English instructor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Korea University, and Yonsei University foreign language institutes

△Complete the national policy course at Seoul National University’s Graduate School of Public Administration

△Completed the highest level course at Harvard University’s Kennedy School

 *Experience in legal studies

 △American lawyer in charge of China at Daeryuk Aju Law Firm

△Full-time professor, Department of Law, Soongsil Cyber University

△Korea University Law School’s highest level course ‘fixed’ lecturer

△Milwaukee District Court Assistant Judge

△American Bar Association ADR Division Member

 *New media experience

 △Liberty Korea Party podcast <Red Banner> panelist and anchor

△Youtube channel Sinui Hansu <World Observatory> political critic

△Kim Jeong-gi TV’s <Direct Direct Comment> representative critic

△Internet media Break News political columnist

 *Political career

 △ People Power Party Yongin (Byeong) National Assembly candidate

△Presidential candidate Yoon Seok-yeol of the People Power Party, member of the political administration division and advisory member of the political reform committee of the campaign committee.

△Liberty Korean Party representative candidate Oh Se-hoon, general manager of the SH Strategy Meeting and head of the election committee organization headquarters

△Grand National Party Presidential Candidate Lee Myung-bak, Chairman of the International Committee and Chairman of the Election Committee's Seoul Victory Competition Preparation Committee.

 *Book

 △Georo English Series for college students [10 volumes in total] (Georo)

△I challenge the possibility of 1% (Chosun Ilbo)

△Rules of Korean negotiation (Youth Shinsa)

△Talking about the future of Korea (Silk Road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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