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간 무료로 밥주고 잠재워준 의인...“이교부, 구세주였나-거지들의 친구였나?“

[아주 유별난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가지다] 익산시 소재 '주현교부'를 이끌어온 '이교부님'

인터뷰어/문일석 발행인 | 기사입력 2022/08/29 [14:15]

'주현교부'란 단체가 있다. 전북 익산시 주현동 174-4에 위치해 있다. '주현교부'를 이끄는 정신적인 지도자는 이교부 씨이다. 그냥 이름대로 '이교부님'이라고 호칭한다. '주현교부'는 지난 65년 간, 무료로 밥을 주고, 무료로 잠을 재워 주었다. 그는 이 시대의 의인(義人)이다. '주현교부'는 교도소에서 막 나온 전과자들, 배고파하는 거지들에게 무료로 밥을 주고 잠을 재워주었던 장소였다. 우리나라에서 그냥 밥을 주는, 밥을 주는 집의 원조(元祖)라 할 수 있다. '이교부님'은 사상범으로 몰려, 한때 투옥(1979년 9월-1981년 4월)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간을 빼고는, 소외된 이들에게 밥을 주는 일만했다. 주변 사람들은 한때 그를 향해 “하늘이 보낸 자”라고 칭송했다. 구세주(救世主)? 그러더니, 결국에는 '이단자(異端者)'로 내몰렸다. 지난 8월27일. 그는 필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종교를 없애러 온 자이지 종교인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교부님은 한때 “호남에서 태어난 구세주”로 알려졌던 인물이다.  Father Lee was once known as “the savior born in Honam.” ©브레이크뉴스

-주현교부가 발행한 “이교부 그 삶과 나라”라는 80쪽 짜리 엔솔로지(anthology) 문집을 읽었다. 이 문집은 어떻게 쓰게 됐나?

▲중앙정보부의 수사로 1979년 9월에 구속됐다. 구속되기 직전, 수사관이 “지나온 과거라도 써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쓰게 된 글이다. 조사 결과 흠이 없으니, 자서전 형태로 써라고 했다. 간증서(干證書)랄까? 하루 저녁에 쓴 글이다. 교리가 아니다. 몇 해 전 시울의 지인이 인쇄해주었다. 일종의 내 명함이랄 수 있다.

 

-얼핏 보기엔 종교운동을 해온 것 같은데...

▲신앙고백을 하자면, 이 단체(주현교부)를 대중화하려는 게 아니었다. 이 자리(전북 익산시 주현동 174-4)에서만 해도 무려 56년 째 이 일을 하고 있다. 원래 200여평의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에 방이 30여개 있었다. 집이 낡아서 지난 2021년 새로 지었다. 전과자들이 오면 밥을 먹여주고 잠을 재워 주는 '나그네들의 집'이었다. 17세부터, 지난 65년간 이 운동을 하다보니까 전국에 식구들이 많이 있다. 지금까지도, 그들을 지도하고 있다.

 

어릴 적, 나의 아버지께서 “너는 말쟁이나 글쟁이가 되지 말라, 말쟁이나 글쟁이가 되면, 세상을 혼란시킨다. 남에게 밥 한 그릇, 물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이 되어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나눠주는 운동을 폈다.

 

부안군 해안가에 3만 여 평의 농토가 있었다. 이 농토에서 농사를 지어, 매년 800 여 가마의 쌀이 생산됐다. 1998년부터 2019년까지, 이 쌀을 전국에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보내 주고, 이 쌀로 밥을 해주었다. 지금은 “참되게 살라“고 가르치는 정신교육 운동을 해왔다.

 

-“종교, 신앙을 가르치는 단체는 아니다”, 이런 이야기 인가?

▲어려서 “하늘을 두려워하라”, “천손민족” 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조상이 곧 하늘”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일부 종교에서는 이단사냥이 있었다. 자기와 사상-이념이 다르면, 이단으로 정죄해 왔다. 그러한, 종교는 하늘에도, 땅에도 필요 없다고 생각해왔다. 교회 혁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의 코앞에 배고프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죽은 뒤 무슨 천당이냐?”는 생각이었다. “사람이 곧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 비 진실한 종교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 이런 종교가 없어져야 나라가 산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하니 이런 종교에 속한 이들이 “이교부는 공산주의자다”, “이교부, 저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다”라며, 나를 이상한 '이단자'로 몰았다. 심지어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전북 익산시 주현동 174-4에 위치한 '주현교부' 건물. ©브레이크뉴스

▲'주현교부' 건물 앞에 선, 이교부님.    ©브레이크뉴스

 

-종교운동이 아니라면? 무엇?

▲내 고향은 익산군 왕궁명 흥암리이다. 면 소재지에 있는 지서(요즘 용어로 파출소) 옆에서 살았다. 이 지서는 고문하는 장소였다. 일제시대, 해방 후 좌익, 6.25 전쟁 때 인공, 민주화 운동에 연루된 이들이, 시대 시대마다 지서에 끌려와 고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걸 지켜보며 자랐다.

 

몇 해 전, 미국의 하버드대 대학을 졸업한 이가 나를 찾아왔다. “나의 일생을 스토리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난, 그런 인물이 못 된다“며, 사양했다. 

 

저는 모든 이념 사상을 떠나, 인간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게 주현교부의 운동이다. 이게 내 교리이고, 내 철학이며, 나의 사상이다. 인간끼리 서로 감동하고 화합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게 내 교리이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다. 종교를 없애기 위한 운동을 벌여왔다.

 

-그렇다면, 따르는 이들이 많나?

▲전국에 나를 아는 사람들이 몇 만명은 될 것이다. 따르는 것은 아니다. 전과자 거지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며 “나라에 충성하라”고 했다. 나에게 그런 교육을 받은 이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

-17세부터 이런 운동을 했지만, 지금도 예금통장에는 돈이 없다. 밥을 먹기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생각만하며 살아왔다. 그리하면, 장기적으로 나라가 잘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 소명(召命)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전과자, 거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을 데리고 농사짓고, 이런 일을 60년이 넘게 하다 보니, 세상에서 나를 무시하지 않고, 널리 알려지게 됐다. 전과자들이 옛날에는 전과자 였을 지라도, 지금은 새 사람이  되어 그 지위가 달라졌다.

 

▲이교부(사진)님은 “죽고 썩은 고기는 폭풍에 떠내려가면 다시 올라오지 않으나, 산고기는 비록 떠내려갈지라도 폭풍이 그치면 다시 올라올 수 있을 것”이라고 피력했다.     ©브레이크뉴스

 

-배고픈 이들에게 밥을 주고, 잠자리가 없는 이들에게 잠을 재워 주는 일을 왜 했나? 운명이었나?

▲반찬 없이  밥을  준 적이 없다. 반찬이 없으면 쑥이라도 캐다가 반찬을 만들어 줬다. 하지만, 지금도 쌓아 놓은 게 하나도 없다. 1970년 대에는 하루에도 수백 명에게 밥을 해 주었다. 그러니 북한에서 돈을 보내준다면서, 나를 사상적으로 헐뜯었다. 어느 해 익산 시청에서 돈을 보내주었다. 그 돈을 익산 시청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이때 내가 한 말은 “나의 집은 이웃을,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집이다. 스스로, 돈을 벌어서 쓰고, 단 10명이라도 도와주는 집이니 그 돈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일은 나의 운명이었다.

 

이교부 씨는 이런 과거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가난한 농촌이 잘 살려면 일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부화기를 만들어 병아리를 부화하여 나누어 주고 특수 원예작물을 권장하고 젖 염소와 꿀벌을 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분양하여 주고, 건축 일도 가르쳐 주며 '무엇이든 열심히 땀 흘려 일을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육신과 마음이 병든다'고 가르치며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솔선수범하면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일을 했다. 저를 아는 종교지도자들이 처음에는 '동양에 별이 나타났다'느니 '하늘이 보낸 자' 칭송을 하시더니 제가 점점 종교에서 말하는 일들이 사실과 다른 것과 이면의 비리를 알게 되어 지적하며 말하기 시작하니까 잘못을 고치려하기 보다 오히려 경계하시고 '이단자다' '자기들을 추종하지 않는다'고, 제거하기 시작했다.(주현교부 발행 '이교부 그 삶과 나라'. 19쪽.)"

 

-조용기 여의도 순복음교회 또는 문선명 통일교회와 같은 종교운동이 아닌, 일종의 사회 저변운동으로 선회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당시 구세주(救世主)라며, 수 천명의 추종자들이 모여들었는데....

▲박정희 정권 때, "이교부, 저 사람이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려 한다”는, 이상한 비난에 휩쓸렸다. 다수의 사람들이 옳다하지 않을 땐, 그 운동을 반대할 땐, 스스로 해산함을 선택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나만 알았지 둘을 몰랐다. 소리 없이,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했다. 진정한 혁명이란 옳은 것을 따라오라고 하는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필자(오른쪽)와 이교부님(왼쪽).  ©브레이크뉴스

 

-이교부 씨는 본인 생각으로 “사상적으로 위험한가?”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조심스럽게, 지난 40여 년 간 북한과도 내놓고 교류 했었다. 일본을 방문, 조총련 간부를 만나 '김일성 주석에게 편지를 써도 되나?'라고 물었다. 김일성 북한 주석에게 “이후 전쟁을 일으키면 민족의  반역자이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시라”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었다. 이후 북한을 돕는, 북한에 쌀을 보내기도 했다.

 

이와 관련. 이교부 씨는 '이교부 그 삶과 나라'라는 문집에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저를 조사했던 중앙정보부 전라북도 분실장이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당신을 조사해보았으나 조금도 허물이 없는 것 같은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꾸 진정서를 내면서 사상범라고 하는데 전라북도 분실에만 내면 자체 처리할 수 있으나 서울 중앙에다 내기 때문에 그때 마다 다시 답변하려고 고통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날 직무에도 바쁘신데 나 같은 사람에게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나는 데모도 할 사람이 아니고 조금도 물의를 일으킬 인물도 되지 못합니다. 내가 간첩이요, 북한에서 공작금을 받아쓴다면 잘나고 능력있는 사람들을 포섭하지 병들고 못난 소외자를 돕겠습니까? 도와주어도 얼마 못가 죽을 사람들 뿐 아닙니까? 그저 불쌍하고 내 부모 형제 같아서 천성으로 타고나서 하는 짓입니다.' 하니, 그 분 역시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사상범이나 간첩이 아니라고 전주에 있는 직원들이 연명으로 상부에 전정했다'고 했습니다.(주현교부 발행 '이교부 그 삶과 나라' 54-55쪽).”

 

그는 민족의 분단과 통일, 주한 미군의 주둔에 대해서도 일반인들과는 다소 다른, 특출 난 시각을 지니고 있다.

 

지난 2018년,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가진 강연에서 “평화는 우리 민족 스스로 주체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심지어 주변국들마저 우리의 평화와 통일 의지를 지지할 수 있도록 우리 민족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시간이 지체되면 될수록 민족이 하나 되는 길은 멀어져 갈뿐”이라면서 “우리 민족이 해결해야 할 최대의 적폐 청산은 분단되고 분열된 민족의 통합과 극복이 아닐 수 없다. 정부와 국민, 북측 당국에게 호소한 것은 국토가 분단되고, 민족이 분열된 상태를 조속히 회복해서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평화적인 화해와 통합을 이루고 통일된 한반도가 국제사회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한미군에 대한 견해도 남다르다. “이교부의 통일론”이란 문집 가운데 “미국에도 간곡히 충언하고자 합니다”라는 중간 제목의 글에서는 “왜 이 나라에서 돌아가지 않고 누구와 싸우려고 있는 것입니까? 북한 때문이라면 무기를 가지고 돌아가십시오. 우리 민족끼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적인 통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미국과 가까운 혈맥을 맺고, 우방이 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땅에서 제일 악연으로 남을 것입니다”고 지적하고 ”미국이 얻고자 하는 것이 정녕 무엇이란 말입니까? 남북이 통일이 되면 지금 미국이 얻고 있는 것 보다 몇 배를 더 얻을 것입니다. 대화와 협상만이 서로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교부는 결코 반미-반일하는 자가 아닙니다. 옳은 것을 옳다, 그릇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사실을 말하는 자 입니다.(2014년 3월16일, 백범기념관 대강당 강연문 중)”고 강조했다.

 

그의 소원 하나가 있다. “우리 민족(남북한)이 하나 되어 교류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 수 있는 민족관이 올바른 지도자가 나와야, 반드시 나라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교부님이 주석하는 방에는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쉬지 않고”라는, 목(木) 조각이 걸려 있다.     ©브레이크뉴스

 

이교부님. 그가 살고 있는 집무실 겸, 잠자는 방을 필자에게 보여줬다. 3m50cm 크기의, 비좁은 방이었다. 이삿짐 차가 버린 것을 주어다 놓은 낡은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이교부, 이 분 대한민국의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데 큰 힘이 됐던 분이다. 특히 배고팠던 전라도 사람들을 도왔던 의인(義人)이었다. 그러하니, 그는 진정한  구세주(救世主=세상 사람들을 구한 주인공)적인 삶을 살아왔던, 선험자(先驗者)였다. 

 

이교부님은 한때 “호남에서 태어난 구세주”로 알려졌던 인물이다. 한 때 구세주(救世主)처럼 보였던 그를 보려고 전국 각지에서 수 천 명이 모여들기도 했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던 박정희 정권은 그의 세력이 하루하루 불어나자, 이교부님을 사상범으로 투옥시켰다. 출옥 당한 그는 수 천 명이 모였던 주현교회를 해산했다. 이때 측근들에게 “때가 되면 다시 모이자”고 했다. 이쯤해서, 던진 질문에 “나는 종교인이 아니었다, 종교를 없애려 왔다”는 아리송한 말로, 과거사를 얼버무렸다. 아울러 “죽고 썩은 고기는 폭풍에 떠내려가면 다시 올라오지 않으나, 산 물고기는 비록 떠내려갈지라도 폭풍이 그치면 다시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고도 했다. 그가 잠자고, 쉬고, 일하는 자그마한 공간인, 주석하는 방에는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쉬지 않고”라는, 목(木) 조각이 걸려 있다. 이 글은? 때가 되면 다시 시작함의 의미와 통할까? 아니면, 산 물고기의 유영(遊泳)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한때 구세주로 추앙됐던 그(이교부)는 지금껏 범부(凡夫)처럼 살아왔다.  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보고 싶은 이들이, 찾아와서 며칠씩 쉬어간다고 한다. 평소에 수시로 저마다 형편에 따라 왕래한다고 한다. 공짜로 밥을 먹고, 공짜로 잠을 자고. moonilsuk@naver.com

 

*인터뷰어/문일석. 시인 발행인.

 

▲주현교부가 발행한 “이교부 그 삶과 나라”라는 등의 문집.     ©브레이크뉴스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The righteous man who gave me free food and put me to sleep for 65 years... “Were you a savior or a friend of the beggars?”

[Meeting a very unusual person and having an interview] 'Governor Lee', who has led the 'Governor of Juhyeon' in Iksan-si

-Interviewer/Publisher Il-Suk Moon

 

There is an organization called 'Church of the Lord'. It is located at 174-4 Juhyeon-dong, Iksan-si, Jeollabuk-do. The spiritual leader who leads the 'Church Father' is Mr. Lee Kyo-Bu. Just as the name suggests, I call him 'Lee Gyo-sama'. 'Church of the Lord' is a house that has provided free food and free sleep in this place for the past 65 years. He is the righteous man of this time. The 'Juhyun Father' was a place where ex-convicts and hungry beggars just came out of prison and gave them free food and put them to sleep. In Korea, it can be said that it is the origin of a house that simply gives rice. 'Father Lee' was considered a thought criminal and was once imprisoned (September 1979-19April 1981). However, except for this period, they only provided food to the marginalized. People around him once praised him as a “sent from heaven.” Savior? Then, in the end, he was driven out as a 'heter'. Last August 27th. “He came to destroy religion, not a religious man,” he said emphatically in an interview with the author.

 

-I read the 80-page anthology, “The Life and Country of this Church,” published by the Episcopal Church. How did you come to write this anthology?

▲ He was arrested in September 1979 under investigation by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Just before he was arrested, the investigator asked, “Please write down the past.” So this is the article I wrote. As a result of the investigation, there were no flaws, so I asked him to write it in the form of an autobiography. A testimony? This is an article I wrote overnight. not a doctrine A few years ago, an acquaintance of Siul printed it out. It could be a kind of my business card.

 

- At first glance, it seems that you have been involved in a religious movement...

▲As for my confession of faith, I didn't mean to popularize this organization. At this location (174-4, Juhyeon-dong, Iksan-si, Jeollabuk-do) alone, I have been doing this for 56 years. Originally, there was a 200-square-foot building. There were about 30 rooms in this building. The house is old and was rebuilt in 2021. It was a 'house of strangers' where ex-convicts came to eat and sleep. Since I was 17, I have been doing this exercise for the past 65 years, so there are many family members all over the country. To this day, he is guiding them.

When I was young, my father said, "Don't be a talker or a writer; if you become a talker or a writer, you confuse the world. Be a person who gives someone even a bowl of rice or a bowl of water.” So, from an early age, I started an exercise to distribute food to hungry people.

There was about 30,000 pyeong of farmland along the coast of Buan-gun. Through farming on this farmland, about 800 kilns of rice were produced every year. From 1998 to 2019, this rice was sent to the poor all over the country, and rice was cooked with it. Now, he has been involved in a mental education movement that teaches “living true.”

 

- Is this a story like “It is not an organization that teaches religion or faith”?

▲When I was young, I heard a lot of sayings, “Fear the heavens” and “the people of thousands and generations.” He was educated that “the ancestors are the heavens”. In some religions there was heresy hunting. If their ideology and ideology are different from theirs, they have been condemned as heresy. As such, it has been thought that religion is not necessary for neither heaven nor earth. It was the idea of ​​a church revolution. There was a hungry and dying person in front of me, and I thought, “What kind of heaven is this after death?” “Man is God,” he taught. He taught that the country is destroyed because of untrue religion. Therefore, those belonging to this religion called me a strange person, saying, “The heathen is a communist” and “The heathen, that person calls himself God.” He even drove him to be a communist.

 

- What if it's not a religious movement? what?

▲My hometown is Heungam-ri, the name of the royal palace in Iksan-gun. I lived next to Jiseo (a police box in modern terminology) in the location of myeon. This branch was a place of torture. I watched the Japanese colonial era, the left wing after liberation, and those involved in the artificial and democratization movement during the Korean War, being dragged and tortured by Jiseo in each era. I grew up watching it.

 

A few years ago, a graduate of Harvard University in the United States visited me. He said, “I said I wanted to make a movie that tells the story of my life. “I can’t be that kind of person,” he declined.

 

I want to share stories in a humane way, leaving behind all ideologies. This is the movement of the Juhyeon Church. This is my doctrine, my philosophy, and my thoughts. If humans can move and harmonize with each other, that is my doctrine. I am not a religious person. campaigns to abolish religion.

 

- So, how many followers do you have?

▲There will be tens of thousands of people who know me all over the country. not follow He taught techniques to ex-convict beggars and told them to “be loyal to the country.” Those who gave me such education are scattered all over the country.

 

I've been doing this exercise since I was 17, but I still don't have any money in my savings account. I have lived my life with only the thought of helping people who cannot afford to eat. I thought that in the long run, the country would do well. I have lived by this calling. But, strangely, people followed me. old hand. Most of them were beggars. Having farmed with them and doing this kind of work for over 60 years, the world did not ignore me and became widely known. Ex-convicts may have been ex-convicts in the past, but now they are new and their status has changed.

 

-Why did you feed the hungry and put the sleepless to sleep? Was it fate?

▲ I have never served rice without a side dish. If there was no side dish, he made a side dish by digging up mugwort. However, nothing has been built up yet. Even in 1970, he fed hundreds of people a day. So they ideologically criticized me for sending money from North Korea. One year, Iksan City Hall sent money. The money was returned to Iksan City Hall. What I said at this time was, “My house is a house where I work for my neighbor and the country. I earn money myself, spend it, and help even 10 people, so I won’t take that money.” This was my destiny.

 

Mr. Lee Kyo-bu described this past as follows.

 

“I thought that if poor rural people were to live well, they had to have a job. He made an incubator, hatched and distributed chicks, recommended special horticultural crops, cared for goats and bees, distributed them to many people, taught construction work, and said, 'Do whatever it takes, work hard and sweat, otherwise you will get sick in body and mind. ', I took the lead regardless of what I was able to do, and worked to the extent that no one could match it. Religious leaders who knew me at first praised 'a man sent from heaven' or 'a change has occurred in the East,' but gradually I realized that the things I was saying in religion were different from the truth, and I started to point out and say something wrong. Rather than doing so, he became wary and began to remove them, saying 'they are heretics' and 'do not obey them'.

 

-What was the reason for turning into a social movement rather than a religious movement such as Yonggi Jo Yoido Full Gospel Church or Sun Myung Moon Unification Church? At that time, he was said to be the savior, and thousands of followers gathered...

▲During the Park Chung-hee regime, I was swept up in strange accusations saying, "This person is trying to make Korea a communist country." "I knew one thing, I didn't know two. I started all over again, silently, from the ground up. A real revolution is about following and doing the right thing."

 

-Mr. Lee Kyobu, in his opinion, “Is it ideologically dangerous?” What are your thoughts on North Korea?

▲Carefully, for the past 40 years, we have been openly interacting with North Korea. When he visited Japan, he met a Chongryon official and asked, 'Can I write a letter to President Kim Il-sung?' He even sent a letter to North Korean President Kim Il-sung, saying, "If you start a war in the future, you are a traitor to the nation, promise not to start a war." Afterwards, he even sent rice to North Korea, helping North Korea.

 

In this regard. Mr. Lee Gyobu wrote the following in his collection of 'The Life and Country of this Gyobu'.

 

“The chief of the Jeollabuk-do branch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who investigated me came to me. He said, 'I've investigated you, but you don't seem to have any faults. Even now, many people keep filing complaints and claiming that you are a saboteur, but if you pay it to the Lost in Jeollabuk-do, you can take care of it yourself, but since you pay it to the center of Seoul, it is painful to answer again each time.' I said, 'You're busy with your work today, so don't waste your time on someone like me. I'm not a demographer, and I'm not even a controversial figure. I'm a spy, and if I dictate public money from North Korea, I'll recruit the good and the capable. Would you like to help the sick and the poor? Aren't they the only ones who will die sooner or later even if they help? It's just pitiful, like my parents and brothers, it's something I'm born to do.' Hani, who also said, 'As we investigated, the employees in Jeonju were transferred to the upper management under joint names.'

 

He has an extraordinary view, somewhat different from the general public, on the division and reunification of the nation and the presence of US forces in Korea. In a lecture held at Suun Hall in Jongno-gu, Seoul in 2018, he said, “Peace must be created independently by our people. Our people must work together so that even neighboring countries can support our will for peace and reunification. The more time delays, the farther the road to uniting the nation becomes. The appeal to the government, the people, and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is that the country is divided and the nation is quickly restored to the divided state, so that the Korean people independently achieve peaceful reconciliation and integration, and the unified Korean Peninsula should go in the direction of contributing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 he asserted.

 

The views on the USFK are also different. In an article titled “I would earnestly give advice to the United States” in the anthology of “The Unification Theory of the Pagan Fathers,” the article said, “Why are you fighting with someone in this country instead of returning home? If it's because of North Korea, take your weapons and go home. Our people can achieve peaceful unification without spilling a single drop of blood. If unification is achieved, the United States will have closer blood ties than any other country in the world and will become allies. Otherwise, it will remain the worst ties on this land.” He pointed out, “What exactly is America trying to achieve? If the two Koreas are unified, they will get many times more than the United States is getting now. You need to know that only dialogue and negotiation are mutually beneficial. This church is by no means anti-American-anti-Japanese. He is a person who tells the truth that what is right is not right, wrong and not.

 

He has one wish. “Only when a leader with the right national view can open the way for our people (South and North Korea) to become one and to live peacefully and exchange as one, can the country be rectified.”

 

Mr. Lee. He showed me his office and sleeping room. It was a cramped room with a size of 3m50cm. All that was left was an old desk and a bed that had been left behind by the moving truck. Lee Kyo-bu, this person has been a great help in helping the poor in Korea. He was a righteous man who especially helped the hungry people of Jeolla-do. So, he was a forerunner, who lived the life of a true savior.

 

Father Lee was once known as “the savior born in Honam.” Thousands of people from all over the country gathered to see what once looked like a savior. As his power grew day by day, the Park Chung-hee regime, which came to power in a military coup, imprisoned Lee Gyo-nim as an ideological criminal. After being released from prison, he dissolved the Joohyeon Church, which had gathered thousands of people. At this time, he told his entourage, “Let’s get together again when the time comes.” At this point, in response to the question posed, he faltered in the past by saying, “I was not a religious person, I came to abolish religion.” In addition, he said, "If dead and carrion fish are washed away in a storm, they will not come back up, but live fish, although they may drift away, will be able to rise again when the storm stops." In the commentary room, a small space where he sleeps, rests, and works, a wooden sculpture that reads “Not in a hurry but without rest” hangs. this article? Does it relate to the meaning of starting over when the time is right? Or, what has it to do with the swimming of live fish?

 

Once revered as a savior, he (a disciplinarian) has been living like a common man (凡夫). It is said that before and after the folk holiday, many followers scattered across the country, those who want to see him, come and rest for a few days. Eat for free, sleep for free. moonilsuk@naver.com

 

*Interviewer / Il-suk Moon. poet publisher.

 

Father Lee was once known as “the savior born in Honam.”

The 'Juhyeon Gyobu' building located at 174-4 Juhyeon-dong, Iksan-si, Jeollabuk-do.

Father Lee, standing in front of the 'Presbyterian Church' building.

A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such as “The Life and Country of this Church” published by the Episcopal Church.

Father Lee emphasized, “If dead and rotten fish are washed away in a storm, they will not come back up.

The author (right) and Mr. Lee (left).

In the room where Father Lee is commenting, there is a wooden sculpture that reads “Not in a hurry but without 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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