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가 바꾼 역사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2/06/19 [10:07]

▲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 동쪽 끝 세인트 마크 대성당에서 연설하는 베네치아 총독 단돌로 기록화   © 이일영 칼럼니스트

 

 

4차 십자군 사령관을 맡았던 프랑스 티발 3세 백작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전략가인 이탈리아의 몽페라트 후작 보니파시오 1세가 후임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 지역 영주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십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의 배후 세력으로 향후 문제의 씨앗이 될 이집트를 먼저 공격하여 거점을 확보하고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에 따른 병력 수송과 보급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는 육로 이동을 피하여 바닷길을 선택하면서 운송능력을 갖춘 해상왕국 제노바와 베네치아 도시국가에 병력 운송을 제안하였다. 제노바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베네치아 총독 엔리코 단돌로는 병력 운송과 보급을 조건으로 점령지 영토에 대한 일정한 권리를 갖는 협약을 맺었다. 이후 출정 날짜가 비밀리에 전달되었다. 1202년 6월 24일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는 짚고 가야할 내용이 많다. 당시 베네치아 총독 단돌로는 비잔틴 국과 끈질긴 협상을 통하여 통상조약을 맺은 후 1200년 술탄 자리에 오른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 알 아딘 왕과도 1202년 통상조약을 함께 맺은 사실이다. 당시 이집트는 1200년에 일어난 대지진과 나일강 유역 홍수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 상업 도시 베네치아와의 협력이 중요하였다. 

 

이집트와 통상조약을 맺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이집트 침공의 가장 주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실은 무엇일까?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인물들이 있다. 당시 독일 왕 필립 슈바벤은 비잔틴 국의 황제를 찬탈당한 이사키우스 2세의 사위였다. 이사키우스 황제가 형 알렉시오스 3세의 반란으로 물러난 후 처남인 알렉시오스 4세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십자군 총사령관으로 등장한 이탈리아의 보니파시오 1세는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와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훗날 역사가들은 이들의 관계에서 비롯된 공모가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이 이루어진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배경에 덧붙여 30년 전 콘스탄티노플에서 눈을 잃은 베네치아 총독 단돌로의 복수심이 주요한 역할을 맡게 된 사실을 헤아린다. 

 

이는 주요 인물들이 비잔틴 국(동로마제국)의 권력과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한 총독 단돌로는 당시 실명 상태로 90이 넘은 고령이었다. 이러한 단돌로에게 베네치아의 운명을 쥔 총독을 맡긴 베네치아 인의 바램은 또 무엇이었을까?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헤아리게 된다. 

 

역사적인 4차 십자군 출정 일인 1202년 6월 24일을 앞두고 십자군들이 집결지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예정된 병력 삼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여 출정 계획은 무산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현금으로 지불해야 할 출정 경비마저 부족한 가운데 병력을 기다리는 동안 지연되는 시간만큼 경비는 또 늘어나 십자군 자체가 채무자였다. 

 

이때 십자군 수뇌부에 베네치아 총독이 충격적인 제안을 해왔다. 아드리아해 연안의 헝가리 영역 달마티아 지방의 도시 자다르(Zadar)를 침략하여 그 전리품으로 십자군 출정 비용을 충당하자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제안에는 또 다른 역사의 앙금이 있었다. 본래 달마티아 지방과 요충 도시 자다르는 베네치아 식민 영토와 도시였다. 베네치아가 혼란을 맞았던 시기에 독립을 선언하며 헝가리 왕의 보호를 받아버린 것이다. 이에 대한 베네치아의 보복이 깔린 제안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결성 당시 기독교도 보호를 강하게 요청하였던 교황의 명령과 함께 기독교도인 십자군이 기독교국인 헝가리를 침략하는 유례가 없는 문제에 논란을 거듭하며 진퇴양난의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출정 무산에 따른 압박감을 활용하여 요충 도시 자다르 확보와 십자군 출정이라는 일거양득을 계산한 베네치아의 끈질긴 제안을 받아들여 침략을 결정하였다. 1202년 11월 11일부터 11월 23일까지 무방비 상태인 도시 자다르는 십자군에 의하여 잔혹하게 침략당하였다.

 

엄밀하게 베네치아의 보복에서 비롯된 자다르 침공은 성지 탈환이라는 신성한 목적으로 구성된 기독교도 십자군이 기독교국에 약탈과 만행을 자행한 최초의 그릇된 역사를 썼다. 이는 전리품에 눈이 멀어버린 십자군과 실제로 실명 상태였던 베네치아 단돌로가 연합한 이성의 눈을 모두 잃은 만행이었다. 나아가 찬연한 역사의 비잔틴 국을 침공하게 되는 슬픈 실명을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기독교국 헝가리령의 도시 자다르를 약탈하여 전리품에 맛을 들인 도덕의 눈을 잃은 실명 파 십자군은 더 큰 수확을 얻게 될 출정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행을 자책하며 희미하게 남아있는 양심의 시력을 지키려는 양심 파 십자군들은 프랑스로 돌아갔다. 

 

십자군의 초유의 만행에 헝가리와 주요 기독교 나라의 항의가 교황청에 쏟아졌다. 격노한 교황은 십자군 자체를 파문하는 엄중한 조처를 내렸다. 다급해진 십자군 지휘부는 사절단을 구성하여 군비 부족으로 야기된 상황을 설명하여 분명한 사주 협의가 있는 베네치아를 제외한 파문을 철회 받았다. 성지 탈환이라는 거대한 명분에 군비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 교황도 한발 물러선 것이다. 

 

▲ 1202년 11월 11일부터 11월 23일까지 자다르(Zadar)도시를 침략한 4차 십자군 기록화   © 이일영 칼럼니스트


우여곡절 끝에 십자군 출병 준비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막대한 비용 문제가 버티고 있었다. 자다르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십자군과 베네치아가 배분한 결과 그동안 지연된 경비 충당에 그쳐 이집트 출정 경비는 고스란히 채무로 남은 것이다. 협상을 거듭하였지만, 해결책이 없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비잔틴제국의 전 황제 이사키우스 2세의 아들 알렉시스 4세였다. 그는 십자군 지휘부에 콘스탄티노플 침략을 제안하면서 아버지의 찬탈 당한 황제 복원을 조건으로 엄청난 보상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그리스 정교회의 가톨릭 통합을 약속하는 역사적인 명분을 내걸며 십자군을 유혹하였다. 이어 막대한 재화와 보물이 소장된 구체적인 비밀스러운 내용을 알리며 십자군을 흔들었다. 여기서 주시할 내용이 있다. 당시 나이 96세였던 베네치아 총독 단돌로가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 동쪽 끝 세인트 마크 대성당에서 이러한 제안 내용을 일반 십자군 병사들에게 열변의 연설로 손수 알린 사실이다. 

 

찬탈당한 황제의 복원과 그리스 정교회와 가톨릭의 통합이라는 명분을 앞세운 기독교도 십자군은 막강한 베네치아 함대를 앞세워 천년의 비잔틴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침공을 시작하였다. 이집트 출정 날짜로 예정되었던 날로부터 정확하게 한 해가 지난 1203년 6월 24일 이었다.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History changed by revenge

- Lee Il-young, columnist

 

After the sudden death of the French Count Tybal III, who had commanded the 4th Crusade, Bonifacio I, Marquis of Montferrat, Italy, the strategist, took over as commander. He led a crusade made up of lords in France and, as a force behind Jerusalem, first attacked Egypt, which is the seed of future problems, to secure a base and retake the holy city of Jerusalem.

 

In order to solve the problem of troop transport and supplies, it was proposed to transport troops to the sea kingdoms of Genoa and Venetian city-states, which have transport capacity, while avoiding the difficult land movement and choosing the sea route. Genoa refused. However, the Venetian governor Enrico Dandolo concluded a treaty with certain rights to the occupied territories, subject to the transport and supply of troops. Afterwards, the departure date was secretly communicated. It was June 24, 1202.

 

There are many things in this history that need to be pointed out. At that time, the Venetian governor Dandolo concluded a trade treaty with the Byzantines through persistent negotiations, and in 1202 also signed a trade treaty with the Egyptian Ayub king al-Adin, who became sultan in 1200. At that time, Egypt was experiencing extreme economic hardship due to the great earthquake in 1200 and the flooding of the Nile River basin, so cooperation with the commercial city of Venice was important.

 

What was the fact that the Republic of Venice, which signed a trade treaty with Egypt, played a major role in the invasion of Egypt? There are some people to look at from this point of view. At that time, German king Philip Swabian was the son-in-law of Isaac II, who had usurped the Byzantine emperor. He was protecting his brother-in-law, Alexios IV, after Emperor Isacus abdicated in a rebellion by his older brother, Alexios III. At the same time, Boniface I of Italy, who appeared as commander-in-chief of the Crusades,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Holy Roman Emperor Henry VI.

 

Later historians conclude that the conspiracy stemming from their relationship was the Fourth Crusade's attack on Constantinople. In addition to this background, the author considers the fact that the vengeful spirit of the Venetian governor Dandolo, who lost his sight in Constantinople 30 years ago, played a major role.

 

Although the main figures were deeply associated with the power of the Byzantine Empire (East Roman Empire), Viceroy Dandolo, who devoted his life to the service of the Republic of Venice, was then aged over 90, blind. What was the wish of the Venetians who entrusted Dandolo the governor who held the fate of Venice? You will figure it out in the story that follows.

 

Ahead of the historic Fourth Crusade, on June 24, 1202, the crusaders gathered at the rallying point. However, the planned deployment was canceled because less than one-third of the planned force was reached. To make matters worse, the cost of the expedition, which had to be paid in cash, was insufficient, and the cost increased by the amount of time delayed while waiting for the troops, and the Crusaders themselves were the debtors.

 

At this time, the Venetian governor made a shocking proposal to the crusaders. It was to invade Zadar, a city in Dalmatia, a Hungarian territory on the Adriatic coast, and use the spoils to cover the cost of the Crusades.

 

A proposal like this had another historical sediment. Originally, Dalmatia and the key city of Zadar were Venetian colonies and cities. During a time of chaos, Venice declared independence and was protected by the Hungarian king. It was a proposal based on Venetian retaliation for this. However, at the time of the formation of the crusade, along with the Pope's order to strongly demand the protection of Christians, the Christian crusaders repeatedly argued over the unprecedented problem of invading Hungary, a Christian country, and it became a dilemma.

 

However, taking advantage of the pressure caused by the failure of the crusade, the invasion was decided by accepting the tenacious proposal of Venice, which calculated both the securing of the key city of Zadar and the crusade. From 11 November to 23 November 1202, the defenseless city of Zadar was brutally invaded by the Crusaders.

 

The invasion of Zadar, strictly derived from Venetian retaliation, wrote the first false history of looting and atrocities against Christian countries by Christian crusaders with the sacred purpose of reclaiming the Holy Land. It was an atrocity that lost both the eyes of reason, the union of the loot-blinded Crusaders and the Venetian Dandolo, who was actually blind. Furthermore, it was a signal that heralded the sad blindness of the invasion of the Byzantine country of brilliant history.

 

The blind crusaders, who had lost their moral eyes to loot and loot the Christian Hungarian city of Zadar, were hoping for a more rewarding campaign. But the conscientious crusaders, who blamed themselves for the atrocities and sought to preserve the dim sight of their conscience, returned to France.

 

Protests from Hungary and major Christian countries poured into the Vatican over the unprecedented atrocities of the Crusades. The enraged pope took stern measures to excommunicate the crusade itself. The urgent crusade command formed a delegation and explained the situation caused by the lack of armament, and the excommunication was withdrawn except in Venice, where there was a clear agreement on the key factors. Even the Pope, who failed to provide adequate armaments for the great cause of reclaiming the Holy Land, also stepped back.

 

▲ Documentary of the 4th Crusade that invaded the city of Zadar from November 11 to November 23, 1202 © Il-Young Lee, Columnist

 

After many twists and turns, preparations for the crusade were resumed, but there was still a huge cost problem. As a result of the distribution of the spoils looted from Zadar by the Crusaders and the Venetians, the delayed expenses were only covered, leaving the expenses of the Egyptian expedition intact. Negotiations were repeated, but there was no solution.

 

The person who appeared at this time was Alexis IV, son of the former emperor Isacius II of the Byzantine Empire. He offered the Crusader command an invasion of Constantinople, offering a huge reward in exchange for the restoration of his father's usurped emperor.

 

Furthermore, he tempted the Crusaders with the historical cause of promising the Catholic unification of the Greek Orthodox Church. Then, the crusade was shaken up by announcing the secret details of the enormous goods and treasures stored there. Here's something to watch out for. It is the fact that the then 96-year-old governor of Venice, Dandolo, personally announced this proposal to the general crusaders in an ardent speech at St.

 

The Christian Crusaders, under the pretext of restoring the usurped emperor and unifying the Greek Orthodox Church and Catholic Church, arrived at Constantinople, the thousand-year-old capital of the Byzantine Empire, and began their invasion with the mighty Venetian fleet. It was June 24, 1203, exactly one year from the scheduled date of the Egyptian expedition.

 

*Writer: Lee Il-young

 

Director of the Korean Art Center. columnist, po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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