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파르나스의 여왕 키키(kiki)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2/05/24 [13:41]

▲ (좌)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1803년 작품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중) 도미니크 앵그르의 1859년 작 “터키목욕탕”/ (우) 만 레이의 1924년 사진 작품 “앵그르의 바이올린”

 

사진 작품 사상 최고가의 기록을 세운 만 레이의 사진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만 레이 자신의 이름과 사진(photograph)을 합성한 용어의 실험적 기법인 레이요그래프 작품이었다. 이는 카메라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 위에 물체를 배치하여 빛이 노출된 부분은 검게 나타나고 빛을 차단한 부분은 하얗게 표현되는 포토그램 기법과 같다. 레이요그래프 방식은 흑백의 질감이 더욱더 깊게 나타나 초현실주의적 감각이 풍부하게 표현되었다.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누드 여성의 등과 바이올린의 사운드 홀(f-holes)을 레이요그래프 기법으로 빚어냈다. 이는 바이올린 현의 진동으로 몸체의 공명을 일으킨 음이 사운드 홀인 울림구멍(f-holes)을 통하여 외부 공기와 만나면서 풍부한 음색으로 표현되는 현상을 인체와 대비하여 바이올린 형태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를 상세하게 해체하면 바이올린 사운드 홀을 그려 촬영한 사진을 겹쳐 완성한 것으로 회화를 접목한 사진의 선구적인 지평을 열었다.

 

만 레이의 사진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프랑스 신고전주의 대표작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가 1803년에 그렸던 작품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에서 영감을 얻었다. 나아가 도미니크 앵그르가 그림을 그리지 않는 시간에는 취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한 사실을 중시하여 작품 제목으로 삼았다.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을 연주한 도미니크 앵그르는 오늘날 툴루즈 국립 오케스트라의 전신이었던 캐피톨 발레단 연주자로 활동하였을 만큼 취미를 넘어선 실력이 있었다. 그는 프랑스 예술원이 매년 실시하는 로마대상 1801년 수상자가 되어 고대 로마예술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견문하며 5년간 이탈리아에서 작업하는 특전으로 1806년까지 로마에 있었다. 당시 1803년에 그린 작품이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이다. 

 

이와 함께 주요하게 살펴야 할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1859년 무렵 완성되었지만, 화가의 나이 82세였던 1862년 보완 수정되었던 작품 “터키목욕탕”이다. 이 작품은 1803년 그려진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이후 무려 56년 후에 그려진 작품이다. 중요한 사실은 “터키목욕탕”의 중심인물인 만돌린을 연주하는 여인의 뒷모습이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과 동일하게 표현된 점이다.   

 

회화적 관점에서 헤아리면 두 작품에 담긴 여인의 뒷모습에서 화가의 특징적인 곡선에 담긴 관능적인 느낌이 동일하게 살펴진다. 나아가 빨간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터번을 쓴 머리부터 흐르는 따뜻한 질감은 반세기에 걸친 시간과 달리 화가가 추구한 감성은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만 레이의 “앵그르의 바이올린”이 도미니크 앵그르의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정리되고 있는 사실을 뛰어넘게 한다. 이는 도미니크 앵그르가 1859년에 그린 “터키목욕탕”에서 만돌린을 연주하는 여인의 뒷모습에 담긴 관능적인 감성은 물론 악기와 인체를 동일시한 만 레이의 승화된 의식이 확인되는 까닭이다. 

 

이를 더욱더 깊숙하게 해체하면 먼저 화가 도미니크 앵그르가 “터키목욕탕”을 구상하게 된 배경에 담긴 많은 이야기를 헤아리게 된다. 그가 “터키목욕탕” 작품을 구상하게 된 것은 오스만 제국에 파견된 영국대사 에드워드 워틀리 몬터규(1671~1761)의 부인 메리 워틀리 몬터규(1689~1762)여사의 서간문 “터키대사관 편지”가 근원이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살펴진다. 1716년 영국 정부는 오스트리아-터키 전쟁의 종식을 위한 협상 인물로 에드워드 워틀리 몬터규를 오스만 제국 대사로 임명하였다. 부인 메리 워틀리 몬터규는 1716년부터 1718년까지 남편의 재임 동안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며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살핀 자연환경에서부터 이슬람 제국의 특성적인 관습과 특히 여성의 삶에 담긴 이야기를 주요한 친지와 친구들에게 편지로 알렸다. 시인이며 작가였던 그녀가 당시 60여 통의 편지에 남긴 많은 이야기 중 특히 오스만제국 무슬림 여성들이 터키목욕탕을 애용하는 내용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당시 대사 부인의 편지는 여러 친구에게 공유되며 화제를 낳았다. 1762년 그녀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763년 편지들은 “터키대사관 편지”로 출판되었다. 이어 반세기 이후 1805년 모든 원고를 취합한 “몬터규 부인의 서간집”으로 다시 출판되면서 터키목욕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널리 알려지며 화제가 되었다.

 

시대의 화가 도미니크 앵그르는 몬터규 부인의 서간집을 접하고 다양한 스케치를 통한 구상으로 화제의 작품 “터키목욕탕”을 그리기 시작하여 1859년 완성하였다. 이렇게 완성된 “터키목욕탕”은 본디 직사각형 그림이었다. 나폴레옹 시대에 1853년부터 1870년까지 대대적인 파리 도시개정이 있기 이전 파리를 촬영한 사진작가로 잘 알려진 찰스 마빌르(1813~1879)가 촬영한 직사각형 형태의 “터키목욕탕” 작품 사진이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다. 화가는 “터키목욕탕” 작품을 1862년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하였던 둥근 원형의 톤도(tóndo) 형태로 수정하였으며 현재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었다.      

 

▲ 메리 워틀리 몬터규(1689~1762)여사의 “터키대사관 편지”와 알리스 프랭의 자서전 “키키의 회고록”


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안고 탄생한 만 레이(1890~1976)의 사진 작품 “앵그르의 바이올린”의 가장 주요한 특성은 여체의 관능적인 누드의 미학을 넘어 바이올린 악기로 승화시킨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형태적 의미가 아닌 현악기 중 가장 높은음을 가진 바이올린이 넓은 음역으로 극히 섬세한 서정적인 감성까지 표현하며 울림의 제왕으로 평가받는 악기에 대한 깊은 의식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당시 시대 상황을 헤아리면 더욱더 깊은 내용이 살펴진다. 1914년 7월부터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종전되었지만, 그해 봄부터 발병한 스페인독감은 1920년까지 세계를 강타하여 세계인구의 3분의 1을 감염시킨 암울한 세상이 이어졌다. 1924년 만 레이가 “앵그르의 바이올린”을 세상에 선보인 시대 상황은 7년 동안의 전쟁과 질병이 이어진 어둠을 걷어내고 오랫동안 억눌린 삶의 해방감이 세계에 넘쳐났던 시기였다. 당시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1896~1940)는 1922년 단편소설 “재즈 시대의 이야기”를 발표하여 해방감에 충만한 1920년대를 재즈 시대로 정의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이를 광란의 시대(Les Années folles)로 표현하였다. 

 

만 레이는 1921년 미국을 떠나 파리 몽파르나스에 정착한 후 가을 어느 날 스무 살 누드 모델 “알리스 어네스틴 프랭”(1901~1953)을 보헤미안 서클에서 만났다. 이들은 빠르게 사랑에 빠져 1929년까지 8년 동안 사랑과 예술이 어우러진 삶을 살았다. 사진예술의 역사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한 작품 “앵그르의 바이올린” 모델이 바로 그녀였다. 

 

알리스 프랭은 부르고뉴의 에사루아 근교인 샤티용 쉬르센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가난한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1913년 12살 소녀 알리스 프랭을 파리에서 출판물 활자 주조 기계 라이노 타이피스트였던 그의 엄마 마리 프랭에게로 보냈다. 이후 알리 프랭은 빵집에서 일하던 중 어머니 마리 프랭이 1918년 재혼하면서 몽파르나스 예술가들의 누드 모델이되었다. 

 

1920년대와 30년대로 이어진 광란의 시대를 관통한 알리스 프랭의 삶은 치열하였다.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누드 모델에서 카바레 가수와 무용수 그리고 배우와 화가에 이르는 다재다능한 예술가적인 삶을 살았던 그녀는 1929년 예술의 도시 파리의 아방가르드 공동체가 선정하는 "몽파르나스의 여왕"이 되었다. 그해 그녀의 자서전 “키키의 회고록”이 출판되었을 때 세기의 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1889~1961)는 소개의 글을 썼다. 자서전은 다음 해 1930년 영문으로 번역되어 미국에서 출판되자마자 배포 금지처분을 받았다. 

 

헤밍웨이는 1921년 캐나다 일간지 “토론토 스타”에 취업 후 9월 유럽 특파원으로 연상의 첫 부인과 함께 파리에 체류하면서 알리스 프랭과 교유하였다. 그녀의 자유분방한 열정의 삶을 헤아린 “몽파르나스의 키키”라는 애칭이 생겨난 배경이다. 키키(kiki)는 스페인어 속어로 좋은 음악과 친구가 있는 파티라는 의미와 함께 프랑스에서 코코(Coco), 지지(Gigi), 피피(Fifi), 루루(Lulu)와 같은 애칭으로 시대를 품어온 무한한 열정을 가진 보헤미안 타입의 별명이었다. 헤밍웨이는 그녀의 자서전 “키키의 회고록” 서문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빅토리아 시대를 지배했던 것보다 몽파르나스 시대를 더 지배했다)고 썼다.

 

몽파르나스의 여왕으로 광란의 시대를 관통한 그녀는 치열한 삶의 무게를 의지한 알코올중독과 약물중독의 후유증으로 1953년 4월 51세의 삶을 마감하였다. 당시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던 그녀는 1974년 오늘날 파리 외곽 주거 도시지역으로 발전한 티에의 파리 묘지로 옮겨졌다. 지난 5월 14일 사진 작품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운 “앵그르의 바이올린” 주인공이었던 그녀를 회고하며 8년간의 뜨거운 열애를 가졌던 만 레이와 결별한 배경이 필자의 가슴을 걸어왔다. 만 레이가 미국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리 밀러(1907~1977)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결별한 까닭이었다. 

 

▲필자/ 이일영 시인.     ©브레이크뉴스

리 밀러는 1929년 파리로 건너가 만 레이의 조수가 되어 함께 작업하면서 그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 이들은 감광재료의 반응을 활용하여 부조와 같은 표현 효과를 얻어내는 솔라리제이션 기법을 개발하여 사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렇듯 새로운 불꽃이 타오른 배경에는 당시 알리스 프랭이 몽파르나스 여왕으로 선정되며 전성기를 구가한 사실과 맞물린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어쩌면 세기의 사진작가 만 레이와 몽파르나스 여왕 서로가 상대를 너무나 잘 알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에 서로를 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몽파르나스의 여왕 알리스 프랭(1901~1953)은 14살의 차이가 나는 세기의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1915~1963)의 삶과 유사한 내용이 많다. 기회가 되면 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Kiki, Queen of Montparnasse

- Lee Il-young, columnist

 

Man Ray's photograph, “The Violin of Ingres,” which set a record for the highest price for a photographic work, was a rayograph work, an experimental technique of a term combining Man Ray's own name and photograph. This is similar to the photogram technique, in which an object is placed on photo paper without using a camera lens, so that the exposed area is black and the blocked area is white. In the ray graph method, the black-and-white texture appears deeper and the surrealistic sense is expressed abundantly.

 

“The Violin of Ingres” is a rayograph technique with the back of a nude woman and the soundholes (f-holes) of the violin. This is a sublimation of the phenomenon in which the sound that caused the resonance of the body due to the vibration of the violin string meets the external air through the f-holes, which are sound holes, and is expressed in rich tones in contrast to the human body in the form of a violin. If it is dismantled in detail, it is completed by superimposing pictures taken by drawing a violin sound hole, opening a pioneering horizon for photography incorporating painting.

 

Man Ray's photograph “The Violin of Ingres” was inspired by the painting “The Bathing Lady of Balpinson” in 1803 by Jean-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a representative French neoclassical artist. Furthermore, the fact that Dominique Ingres played the violin as a hobby when he was not painting was emphasized, and the title was chosen as the title of the work.

 

Dominique Ingres, who has been playing the violin since childhood, had a talent beyond his hobbies to the point where he worked as a performer with the Capitol Ballet, the predecessor of the National Orchestra of Toulouse today. He was the recipient of the Rome Grand Prize held annually by the French Academy of Arts in 1801, and was in Rome until 1806 with the privilege of working in Italy for 5 years, studying ancient Roman art and Italian Renaissance art. The work he painted in 1803 at the time was “The Bathing Woman of Balpinsong”.

 

Along with this, there is another work that should be looked at. It was completed around 1859, but was supplemented and revised in 1862 when the artist was 82 years old, “Turkish Bath”. This work was painted 56 years after “The Bathing Woman of Balpinsong” painted in 1803. The important fact is that the back of the woman playing the mandolin, the central character of "Turkish Bath", is expressed in the same way as "The Bathing Lady of Balpaengsong".

 

Counting from a pictorial point of view, the sensual feeling contained in the painter's characteristic curves is equally examined from the back of the woman in the two works. Furthermore, the warm texture flowing from her hair wearing a red and white turban did not change the sensibility that the artist pursued, unlike the time spanning half a century.

 

These facts go beyond the fact that Man Ray's "The Violin of Ingres" is being summarized as being inspired by Dominique Ingres's "The Bathing Lady of Balpinson". This is because the sensual sensibility contained in the back of a woman playing the mandolin in “Turkish Bath” painted by Dominique Ingres in 1859 is confirmed as well as Man Ray’s sublimated consciousness of equating the instrument with the human body.

 

If we deconstruct it more deeply, we can first count the many stories behind the idea of ​​the “Turkish Bath” by the painter Dominique Ingres. He came up with the idea of ​​“Turkish Bath” from the letter “Turkish Embassy Letter” from Mary Waterley Montagu (1689–1762), wife of Edward Watley Montagu (1671–1761), British ambassador to the Ottoman Empire.

 

Summarizing this, the story is as follows. In 1716, the British government appointed Edward Watley Montagu as ambassador to the Ottoman Empire as a negotiator for the end of the Austro-Turkish War. Her wife, Mary Wotley Montagu, lived in Constantinople during her husband's tenure from 1716 to 1718 and traveled through various regions, telling the story of her salpin' natural environment, the customs characteristic of the Islamic Empire, and especially the lives of women. She informed her principal acquaintances and friends in a letter. Among the many stories that she, as a poet and writer, wrote in more than 60 letters at the time, in particular, the use of Turkish baths by Muslim women in the Ottoman Empire was vividly conveyed.

 

At that time, the ambassador's wife's letter was shared with several of her friends and created a topic of discussion. In 1763, the year after her death in 1762, her letters were published as “Turkish Embassy Letters”. Then, half a century later, in 1805, it was republished as "Mrs. Montagu's epistle," a compilation of all manuscripts, and detailed records of the Turkish bath became widely known.

 

Dominique Ingres, the painter of the era, came across Mrs. Montagu's epistle, and started drawing the topic "Turkish Bath" with various sketches and completed it in 1859. The completed “Turkish Bath” was originally a rectangular painting. The only photograph of the rectangular “Turkish Bath” photographed by Charles Mavill (1813-1879), well-known as a photographer who photographed Paris before the major Paris city reform from 1853 to 1870 in the Napoleonic era, is reported. there is. The artist modified the “Turkish Bath” work in 1862, in the form of a round tondo that was popular during the Renaissance, and is currently housed in the Louvre Museum.

 

▲ “Letters from the Turkish Embassy” by Mary Wotley Montagu (1689–1762) and Alice Frank’s autobiography “Memoirs of Kiki”

 

The most important characteristic of Man Ray's (1890 ~ ​​1976) photographic work “The Violin of Ingres”, which was born with so many stories, is the fact that she transcended the aesthetics of sensual nudes of her female body and sublimated it into a violin instrument. This means that the violin, which has the highest note among string instruments, has a wide range and expresses extremely delicate lyrical sensibility, not a simple morphological meaning.

 

Furthermore, if we consider the circumstances of the times, we can examine the contents more deeply. World War I, which began in July 1914, ended in November 1918, but the Spanish flu that started in the spring of that year swept the world until 1920, leaving a bleak world that infected a third of the world's population. In 1924, Man Ray presented “Ingres’s Violin” to the world, when the darkness of seven years of war and disease was lifted and the world overflowed with a sense of liberation from life that had been suppressed for a long time. The great Gatsby writer Scott Fitzgerald (1896-1940) published his short story “The Story of the Jazz Era” in 1922 and defined the 1920s full of liberation as the jazz age. In France, this was described as the Age of Frenzy (Les Années folles).

 

After leaving the United States in 1921 and settling in Montparnasse, Paris, Man Ray met a twenty-year-old nude model “Alice Ernestine Prin” (1901-1953) at Bohemian Circle one day in the fall. They quickly fell in love and lived a life of love and art for eight years, until 1929. It was she who modeled her work “The Violin of Ingres,” which recorded the highest price in the history of her photographic art.

 

Alice Frank was born an illegitimate child in Chatillon-Sursen, a suburb of Essaro in Burgundy, and was raised by a poor grandmother. Her grandmother sent 12-year-old Alice Prin in 1913 from Paris to her mother, Marie Frank, who was a rhino typist for a publication type-casting machine. After working in a bakery, Ali Fran became a nude model for Montparnasse artists when her mother, Marie Frank, remarried in 1918.

 

Through the frenzy of the 1920s and 30s, Alice Frank's life was intense. Although she had no special education, she lived a multi-talented artistic life, from nude models to cabaret singers and dancers, and actors and painters. it became When her autobiography, “Memoirs of Kiki,” was published that year, the literary writer of the century Ernest Hemingway (1889–1961) wrote an introductory note. The autobiography was translated into English the following year in 1930 and was banned from distribution as soon as it was published in the United States.

 

Hemingway got a job in the Canadian daily “Toronto Star” in 1921, and in September he met Alice Frank while staying in Paris with his first wife as a European correspondent. This is the background to which the nickname “Kiki of Montparnasse” was born, referring to her free-spirited and passionate life. Kiki is Spanish slang, meaning a party with good music and friends, and in France, nicknames such as Coco, Gigi, Fifi, and Lulu. It was a nickname for the bohemian type with Hemingway wrote in the foreword to her autobiography, "Memoirs of Kiki," (Queen Victoria ruled the Montparnasse era more than it did the Victorian era).

 

Having passed through a frenzy period as Queen of Montparnasse, she ended her life at the age of 51 in April 1953 due to the aftereffects of alcohol and drug addiction, which relied on the weight of her fierce life. She was then buried in the Montparnasse Cemetery, but in 1974 she was moved to the Paris Cemetery in Thiers, which has developed into a residential urban area outside Paris today. On May 14, she recalled her being the protagonist of “The Violin of Ingres,” which set a record for the most expensive photography ever, and the background to her breakup with Man Ray, whom she had been dating for eight years, walked through her heart. It was because of her breakup that Man Ray began her relationship with American Surrealist photographer Lee Miller (1907–1977).

 

Lee Miller moved to Paris in 1929 and became Man Ray's assistant, working together, with whom she fell in love. At that time, they opened a new chapter in the history of photography by developing a solarization technique that uses the reaction of photosensitive materials to obtain expressive effects such as relief. In the background of this new flame, there are many stories connected with the fact that at that time, Alice Frank was selected as the Queen of Montparnasse and her heyday was achieved. Perhaps the photographer of the century, Man Ray and the Queen of Montparnasse, knew each other so well that they sent each other off at the most appropriate time.

Alice Prin (1901-1953), queen of Montparnasse, has many similarities to the life of chanson singer Edith Piaf (1915-1963), who was 14 years apart. When I get a chance, I'll take a look at this.

 

*Writer: Lee Il-young

Director of the Korean Art Center. columnist. po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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