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애국가 바꿀 필요가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야...

제헌국회와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의 '애국가 문제'...선진화와 통일을 겨냥하는 새로운 상황의 요구에 맞게

이영일 전 의원 | 기사입력 2021/04/05 [12:50]

1. 들어가면서

 

우리 애국가는 2020년 광복절 날 김원웅 광복회장의 기념사로 대한민국 건국이후 최초로 매도당했다. 여기서 건국이후 최초라 함은 북한정권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이 선포되는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대한민국의 국호, 국기, 애국가를 부정해 왔는데 대한민국에서는 그러한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는 국가 의전행사 자리에서 광복회장이라는 자가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씨를 친일파로 규탄하고 친일역적이 만든 애국가를 국가(國歌)로 부르는 나라가 어디에 있겠느냐고 극단적 언사로 애국가를 힐난(詰難)한 탓이다. 

 

안익태 씨를 친일파로 몰아댄 언동에 대해서는 안익태 씨의 조카인 재미교포 안경용 씨가 2020년 12월 법원에 허위사실유포에 의한 사자명예훼손으로 김원웅을 고발했다. 앞으로 사법당국의 판결로 진위가 가려질 것이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金九主席)이 한국애국가로 명명(命名)하고 국내외 동포가 함께 부르도록 한 이래, 지금까지 전 국민이 함께 부르고 있는데 애국가의 작곡가를 마치 친일찬가의 작곡가처럼 공공연히 친일파로 매도한 것이다. 

 

▲ 김원웅 광복회장.

 

나는 광복회장의 언동을 보면서 대한민국을 반대해온 김일성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수단 가운데 태극기와 애국가를 항상 포함 시켰는데 주사파들이 바야흐로 그러한 부정음모에 말려든 것이 아닌가 하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안익태 씨에게 친일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시점상 한국 정치권에서 논란되는 ‘친일’논쟁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한 말(韓末)이나 일제 치하에서처럼 일본을 찬양하고 일본 이익을 지지하는 반민족 행위자는 하나도 없다. 한국의 급성장이 일본 수준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또 몇 개 부분에서는 일본을 이미 앞서가는 발전상황에서 누가 친일하겠는가. 친일파론의 진상을 들여다보면 종북(從北) 내지 친북세력으로 몰리는 좌파들이 우파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들을 방어하면서 우파를 역공하는 언어테러수단으로 친일프레임 씌우기 공작을 벌이는 것이다. 좌파는 반공국가인 한국에서 우파를 친일 내지 토착왜구(土着倭寇)로 몰면서 자기들을 반일 민족세력으로 포장해야 이 땅에 발붙일 여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광복회장이 해방된 지 75년을 지나는 시점에서 내외 정세와 여건변동을 감안, 우리 애국가를 국가(國歌)로서 재론해 보자고 문제를 제기했다면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지만 음악가에게 정치적 잣대를 들이밀어 친일 프레임을 씌우면서 애국가를 폄하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우리나라 애국가의 내력(來歷)을 되돌아보고 한말(韓末)과 독립운동 시기, 그리고 제헌국회가 보인 애국가에 대한 태도를 재조명(再照明), 앞으로 우리 국가(國歌)로서의 애국가 문제에 대한 필자의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2. 국가 또는 애국가의 기원

 

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애국가 제정운동 

 

중국이라는 큰 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국권을 유지해온 조선왕조는 서양처럼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국가근대화의 길을 걷지 않았다. 중국에 매달려 문호개방을 거부하다가 1876년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고 타의로 문호를 개방했다. 이때부터 조선도 국가 대 국가 간의 조약체결 당사자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면서 의전(儀典)상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를 가질 필요가 생겼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패함으로써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고종이 황제를 칭하면서부터 의전적(儀典的) 필요가 더 절박해졌다. 이에 국기와 국가제정에 착수했다. 국기(國旗)는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박영효(朴泳孝)의 건의로 4괘(卦) 태극기를 국기로 정하고 이를 1883년 1월에 공포했다. 국가제정은 국기보다 늦어졌다. 당시 군제를 개편하면서 신식 군대의 군악대를 만들고 군악대를 지휘할 프러시아 인 Franz Eckert를 초빙하면서 그에게 국가 작곡을 의뢰하였다. 그가 작곡한 국가가 대한제국애국가였다. 오늘날 한국 찬송가 70장의 선율과 거의 같다. 그러나 이 국가는 의전용으로만 사용되었을 뿐 잘 알려지지 않았고 대한제국의 패망과 함께 잊혀졌다.  

 

나. 독립협회의 결성과 애국가운동

 

조선의 말기에 신진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개화민족주의자들은 청나라, 즉 중국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지향하면서 독립신문(1986년 4월)을 발간하고 국가의 상징인 애국가 제정을 위해 가사(歌辭)를 공모했다. 당시 공모에 응한 애국 가사는 총 32편인데 이때 이미 나라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가곡이 민간에서 만들어져 퍼지기 시작했다. 배재학당 등 조선인 학교나 교회에서는 찬송가로 보급된 서양 음률에 한국가사를 넣어 부르는 이른바 ‘노가바’(노래가사바꿔부르기)형식의 노래들이 유포되고 있었다.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결성된 후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난 자주독립국으로서 대한제국의 정체성(正體性)을 확립하고 국민들을 단합시킬 명분으로 1896년 11월 21일 서울 서대문의 모화관(慕華館)에 붙은 영은문(迎恩門)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 정초식에는 조선이 중국의 예속에서 벗어난 자주국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배재학당을 비롯한 신식 학교 학생들이 다수 참석하여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이때 불린 애국가의 가사나 곡조가 제대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애국가 연구가들의 대다수는 후에 윤치호(尹致昊) 작사로 알려진 애국가 가사가 스코트랜드 민요인 Auld Lang syne의 ‘노가바’ 형식으로 불렸을 것으로 보는데 이 곡은 현재 찬송가 280장(천부여 의지 없어서)에서 재현되고 있다. 애국가의 작사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1907년 윤치호가 편집, 출판한 ‘찬미가’에 원형이 존재하기 때문에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Auld lang Syne의 애국가는 3.1운동 당시에는 만세운동대열에 참가한 각계각층의 국내외 동포들이 열렬히 합창하였기 때문에 민중 속에 널리 퍼졌으며 해방 후 안익태의 애국가가 정식으로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그 자체가 곧 애국가로 통용되었다. 

 

▲강효백 박사는 "애국가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강 박사는 "식민통치로부터 독립을 이룩한 나라들의 애국가는 오랫동안 주변에서 들려왔던 애국가와 매우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다. 안익태의 애국가

 

음악가 안익태(1906~1965)는 평양에서 초등학교와 숭실중학교를 다녔다. 중학 재학 시 1919년 3.1운동에 연루된 애국인사 석방운동을 벌이다가 퇴교당한 후 1920년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양악기인 첼로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일본 유학의 길에 오른다. 그는 동경음악학교를 마친 후 서양음악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한인교회에서 처음으로 Auld lang syne의 애국가를 들었다. 그는 이 노래를 들은 후 역사를 가진 민족의 애국가를 외국의 술집이나 남녀가 이별할 때 부르는 처량한 민요곡에 맞춰 부르는 것은 민족적 수치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서양음악의 표준에 맞춰서 제대로 된 애국가를 기필코 작곡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미국 땅에서 어렵게 공부하면서 정성을 쏟아 작곡에 힘을 기울여 1935년 11월 작곡을 끝마치고 한인교회주관으로 애국가 발표회를 가졌다. 이후 재북미 시카고 대한인회(大韓人會)는 안익태의 애국가를 북미동포사회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안익태는 애국가 작곡과 발표회를 마친 후 자기가 평소에 사사(師事)했던 스승을 찾아 서양음악의 본바탕인 유럽의 Wien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이때부터 그의 활동무대는 그가 조국을 다시 찾은 1955년까지 미국과 유럽이었고 미국보다는 유럽 체류 기간이 더 길었다. 

 

그가 유럽으로 떠난 후 재 북미(在 北美) 대한인회 집행위원회는 안익태의 애국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품청하여 사용허가를 받기로 결정하고 안익태 작곡의 악보가사를 인쇄, 중경(重慶)임시정부로 보냈다. 김구(金九) 주석은 서양음악을 전공한 대한의 애국청년이 애국가를 작곡해서 북미동포들에게 알리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 1941년 1월 임시정부에서 안익태의 애국가 사용을 허가하고 임시정부공보(제 69호)에 발표했다. 이때 김구 주석은 Auld lang Syne 애국가를 ‘조선애국가’로, 안익태의 애국가를 ‘한국애국가’로 칭하면서 자기의 초상이 든 한국애국가 악보를 인쇄, 중국대륙에 산재하는 독립운동 진영에 배포하는 한편 광복군들에게도 가르치고 임시정부 의전행사에서도 한국애국가를 불렀다. 

 

3. 해방된 조국과 애국가 문제

 

가. 국기와 국가에 관한 건의안 토론

 

제헌국회는 4281(1948)년 9월9일 제61차 본회의에서 의사 일정 제5항인 ‘국기와 국가에 관한 건의안’을 상정하고 김약수 부의장 사회로 의안심사에 착수했다. 이날 맨 처음 등단한 정균식 의원은 국기(國旗)와 국가(國歌)에 관해 자기의 소견을 피력했다. 그는 국기는 ”우리 국호(國號)를 3.1독립정신을 계승, 대한민국으로 정한 이상 태극기를 대한민국의 국기로 정하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국가(國歌)는 애국가와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신생독립국가의 국가답게, 가사도 전국적으로 공모하여 문화예술계 심사로 결정하고 작곡도 바꿀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강욱중 의원은 “우리나라에는 태극기는 물론이거니와 이미 애국가도 거의 국가화(國歌化)되어 있는 실정이고 국가(國歌)도 나라의 상징이 되려면 어느 정도 역사성을 지녀야 하는데 우리의 태극기와 애국가는 항일 독립운동 시기에 독립을 꿈꾸는 겨레들이 가슴 깊숙이, 가장 은밀한 곳에 간직했던 깃발이었고 노래였다면서 ”우리가 3.8선 문제를 피로 해결하지 않으려면 적당한 시기에 미소 양국 군대의 철퇴를 요구하고 남북한 동포들이 다같이 태극기 아래 뭉쳐 해결을 도모해야 한다면서 새 국가제정에 반대했다. 이주형 의원도 북한의 반동분자들처럼 우리도 ”국가임네“하고 국기와 국가를 따로 제정한 것은 통일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조국이 완전 통일되어 3천만 동포 전체의사가 수렴되는 의사당에서 국기와 국가를 제정할 수 있을 때까지 국가제정논의를 보류하자고 했다. 그러나 정광호의원은 ”우리가 어떠한 조건이 완성될 때까지 논의를 보류하자는 동의는 우리 스스로를 조건에 구속시키는 것이라면서 앞으로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터에 조건부 보류는 하지 않는 것이 옳다면서 차라리 국가제정건의안을 폐기시키라고 주장했다. 이에 이주형의원도 보류동의안을 철회했고 맨 처음 제안 설명에 나섰던 정균식 의원도 이 문제에 관한 국회 전체의 논의상황을 감안, 건의를 철회했다.  

 

결국 제헌국회는 3.1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한민국이 임시정부가 채택했고 남북한 동포들이 그 역사성을 공유하는 태극기와 한국애국가를 통일의회가 구성될 때까지 그대로 사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나. 북한의 애국가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북한지역에 철의장막을 쳐놓고 1947년에 이미 소련의 위성국가로서 북한지역에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이 상태에서 김일성은 1946년 9월 27일 북측 작가들을 모아놓고 임시정부가 채택한 애국가의 가사 내용이 인민들의 감정에 맞지 않고 외국 것을 따 다 만든 곡으로 시원치 않다면서 애국가를 새로 만들라고 지시, 박세영 작사, 김원균 작곡으로 된 애국가를 최종적으로 채택했다. 다만 발표 시기는 1948년 5월10일 총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결정했다. 그것은 국토분단의 책임을 남한 측에 전가하려는 저의 때문이었다. 북한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8년 9월8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헌법을 채택한 뒤 9월9일 김일성을 내각 수상으로 하는 각료명단을 승인하면서 인공기(人共旗)와 애국가를 채택, 부르기 시작했다.

 

▲ 이해영 공동대표(국가만들기시민모임)는 “표절과 자기표절은 ‘창작’을 하는 모든 이에게 금기시되는 행위이며, 가장 기본적인 ‘양심’의 문제이다. 일반적인 노래도 표절곡은 방송 금지 대상이다.”며, “하물며 다른 나라의 노래와 이처럼 닮은 선율을 ‘애국가’로 부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낯 뜨거운 일이며, 국민 모두가 오랫동안 불러왔다고 해서 그 부끄러움이 해소되지는 않는다.”고 역설했다. 

 

다. 안익태 애국가를 둘러싼 국론의 흐름

 

안익태의 애국가(이하 한국애국가로 한다)는 임시정부의 사용허가를 계기로 1942년 8월 29일 개국한 미국의 소리(VOA) 한국어 방송에서 맨 처음 

 

방송되었고 매일 1절을 되풀이 했다. 또 제헌국회에서 애국가에 관한 논의가 끝난 때를 전후해서 국내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1946년 5월 중등음악교과서가 펴낸 “임시중등음악교본”이 출판되어 모든 학교의 음악교재로 사용되었는데 이 교과서의 첫 번째 곡이 한국애국가였다. 이어 한국애국가는 1948년 정부수립이래 줄곧 방송되었고 TV는 1956년 5월부터, 곧이어 1961년 12월 31일부터 오늘까지 시작과 끝 시간에 방영되고 있다. 현재는 정부는 국가의전편람에서 애국가를 국가(國歌)에 준하여 부르도록 하고 있다.    

 

4. 결론과 금후의 과제 

 

음악가 안익태는 한 평생을 미국과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럽생활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 그를 뒷받침해주던 미국의 독지가로부터의 지원이 끊겼고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일본 여권 때문에 미국에도 되돌아갈 수 없었다. 이 당시 그가 가진 생계수단은 오직 연주, 작곡, 지휘뿐이었다. 

 

지금 일부 비주류 재야사학가들은 그를 친일분자로 낙인찍고 있다. 그가 독일제국음악협회 회원이었다는 것과 1942년 만주국탄생 10주년 기념음악회를 위해 작곡과 연주를 했다는 이유에서다. 제국음악협회 회원이 된 것은 독일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안익태의 지휘능력을 평가, 자기의 제자로 삼으면서 그를 입회시켜 주었다. 당시는 회원이 되어야 독일에서 연주 활동으로 먹고 살 수 있었다. 독·일(獨·日)문화협회가 주관한 만주국 창립 10주년 음악회에서 작곡과 지휘라는 일감을 수주(受注)할 수도 있었다. 그가 연주한 작곡명은 ‘큰 관현악과 혼성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滿洲)’였다. 여기에는 안익태의 음악이 들어 있을 뿐 친일로 몰릴 가사는 없었다. 망국(亡國)음악가의 아르바이트였을 뿐이다. 만리타향에서 외롭게 살면서 세계적 음악가로 성장했고 또 가장 발랄했던 젊은 시절에 미국에서 ”한국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씨에게 친일파 프레임을 씌워 예술의 영역에 정치적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공산 전체주의자들이나 파쇼 정권이 벌일 미친 짓이다. 

 

또 한국애국가는 이미 안익태의 손을 떠나 전 국민의 애국가가 된 지 반세기를 훨씬 넘었다. 그의 유가족들도 애국가의 음원(音源)에 대한 권리를 우리 정부에 기증했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일은 건국과 독립의 과제를 넘어서서 한류의 파고를 타고 선진화와 통일을 겨냥하는 새로운 상황의 요구에 맞게 한국애국가를 바꿀 필요가 있는지 여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일일 것이다. <이 글은 '헌정지'에도 게재됐다>.  rh201@hanmail.net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이다. * Below is the [full text] of an English article translated from the above article as'Google Translate'.

 

▲ 이영일 전 의원.  ©브레이크뉴스

*필자/이영일 

전 의원(11,12,15대 의원).

 

Constitutional National Assembly and the national anthem composer Ahn Ik-tae's'the issue of the national anthem'... to meet the demands of a new situation aimed at advancement and reunification

Korea needs to change the national anthem? Serious reflection...

-Former Congressman Lee Young-il

 

1. Entering

 

Our national anthem was sold for the first time since the founding of the Republic of Korea as a commemorative remark of Liberation Chairman Kim Won-woong on the day of Liberation Day in 2020. Here, the first term since the founding of the country means that the North Korean regime has consistently denied the national flag, national flag, and national anthem of the Republic of Korea from the day the founding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declared on August 15, 1948 to today, but that has not happened in the Republic of Korea. At the national protocol event where the President celebrated, the Liberation Hall condemned the composer Ahn Ik-tae as a pro-Japanese, and condemned the national anthem with extreme remarks, saying where there would be a country that called the national anthem created by pro-Japanese history as a national anthem. That's it.

 

Regarding Eon-dong, who drove Ahn Ik-tae into pro-Japanese, Ahn Ik-tae's nephew, Ahn Myung-Kyo-yong, has accused Kim Won-woong of the lion's honor by spreading false facts to the court in December 2020. In the future, the judgment of the judicial authorities will mask the authenticity.

 

The national anthem we call now is the national anthem since President Kim Gu (金九主席)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named it Korean anthem and made it sung by domestic and foreign compatriots. Like a composer, it was openly sold to the pro-Japanese.

 

As I watched the words and actions of Chairman Gwangbok, Kim Il-sung, who had opposed the Republic of Korea, always included Taegeukgi and the national anthem as a means of denying the Republic of Korea. In particular, the pro-Japanese frame for Mr. Ahn Ik-tae is related to the “pro-Japanese” debate that is controversial in Korean politics. There are currently no anti-ethnic actors in the Republic of Korea who praise Japan and support Japanese interests as they say or under Japanese rule. With Korea's rapid growth approaching Japan's level, and in some areas, who will be pro-Japanese in the development situation that is already ahead of Japan? Looking at the truth of the pro-Japanese theory, the leftists, which are concentrated in North Korea or pro-North Korea, defend themselves from the attacks of the right, and work to cover the pro-Japanese frame as a means of verbal terrorism against the right. This is because in Korea, which is an anti-communist country, it is necessary to drive the right wing to pro-Japanese or indigenous Japanese war and wrap themselves as anti-Japanese national forces in order to create room for foot in this land.

I can accept it positively if I raised the issue to reconsider our national anthem as a national anthem, taking into account the fluctuations in domestic and foreign circumstances and conditions after 75 years of liberation from the Liberation Chairman. It is a mistake to disparage the national anthem while putting on a pro-Japanese frame.

From this awareness of the problem, I look back on the history of Korea's national anthem, re-examine the Korean language, the period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attitude toward the national anthem seen by the Constitutional Assembly, and in the future, the national anthem as a national anthem. I would like to express my opinion on the problem.

 

2. Origin of the country or national anthem

 

end. Korean Empire's National Anthem Movement

The Joseon Dynasty, which has maintained its national power by paying tribute to a large country called China, did not walk the path of national modernization due to the rise of nationalism like the West. He was stuck in China and refused to open the door, but in the wake of the Unyangho incident in 1876, he signed a treaty for the protection of the sick with Japan and opened the door for a different purpose. From that time on, as Joseon also gained the status as a party to the treaty between state and state, it was necessary to have the national flag and the national anthem. Japan's defeat in the Sino-Japanese War changed the country's name from Joseon to the Korean Empire, and when Gojong named Emperor, the need for a protocol became more urgent. Accordingly, the national flag and state establishment began. The national flag was decided by Park Young-hyo, who went to Japan as a recipient in 1882, and declared the four-gwa (卦) Taegeukgi as the national flag and promulgated it in January 1883. The establishment of the country was later than the national flag. During the reorganization of the military regime at the time, he invited Franz Eckert, a Prussian who would create a military band for the new army and command the military band, and commissioned him to compose the state. The country he composed was the Korean Empire Patriotic. Today it is almost the same as the melody of chapter 70 of Korean hymns. However, this country was only used for ceremonial purposes and was not well known and was forgotten with the defeat of the Korean Empire.

 

I. Formation of Independence Association and National Anthem Movement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the enlightened nationalists, seeking independence from the Qing Dynasty, or China, published the Independence Newspaper (April 1986) and conspired with lyrics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national anthem, the symbol of the country. . At that time, there were 32 patriotic lyrics that responded to the competition, and by this time several songs on the theme of love for the country were made and spread in the private sector. In Korean schools and churches such as Bae Jaehakdang, so-called “nogaba” (singing songs) style songs were circulating with Korean lyrics added to the Western rhythms that were spread as hymns.

 

After the Independence Association was formed in July 1896, it was in the Mohwagwan in Seodaemun, Seoul on November 21, 1896 as a cause to establish the identity of the Korean Empire as an independent and independent country free from foreign interference and unite the people. The Independence Gate was erected in the place of the attached Yeongeunmun (迎恩門). At the inauguration ceremony of the Independence Gate, Chosun declared that it was a sovereign state that escaped the subordination of China, and at the same time, a number of new school students including Pai Chai Hakdang attended and sang the national anthem. The lyrics and tunes of the national anthem sung at this time were not well known, but most of the national anthem researchers believe that the lyrics of the national anthem, later known as the lyrics of Chi-ho Yun, would have been sung in the form of'Nogaba' by Auld Lang syne, a Scottish folk song, which is currently 280 hymns. It is reproduced in (Because there is no willingness). There are many theories about the lyrics of the national anthem, but there are many theories that Chiho Yoon wrote the lyrics because the originals exist in the song'Hymology' edited and published by Chiho Yoon in 1907. Auld lang Syne's national anthem was widely spread among the people because compatriots from all walks of life, who participated in the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during the March 1st Movement, enthusiastically sang, and after liberation, until the anthem of Ahn Ik-tae officially appeared, it was soon used as an national anthem. .

 

All. An Ik-Tae's National Anthem

 

Musician Ahn Ik-tae (1906~1965) attended elementary school and Soongsil Middle School in Pyongyang. When he was in junior high school, he went on the path to study in Japan to major in cello music, a Western musical instrument, with the help of a missionary in 1920 after he was expelled from the campaign for the release of patriots involved in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After completing Tokyo Music School, he studied abroad in the United States to properly learn Western music. After arriving in San Francisco, he heard Auld lang syne's national anthem for the first time at a Korean church. After listening to this song, he thought that it was a national shame to sing the national anthem of a nation with a history in line with the grim folk song sung by a foreign bar or when a man and woman broke up, and he decided to compose a proper national anthem in accordance with the standards of Western music. did. He studied hard in the United States, devoted himself to composition, and finished composition in November 1935, and held an anthem presentation held by the Korean Church. Afterwards, the Korean Association of Chicago in North America began to spread Ahn Ik-tae's national anthem to the North American Korean society. After completing his national anthem composition and presentation, Ahn Ik-tae moved to Wien, Europe, which is the basis of Western music, in search of a teacher he had usually studied. From this time on, his activities were in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until 1955, when he returned to his homeland, and he stayed in Europe longer than in the United States.

 

After he left for Europe, the executive committee of the Korean Association of North America in North America decided to obtain permission to use Ahn Ik-tae's national anthem to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song lyrics composed by Ahn Ik-tae were printed and sent to the Chongqing Provisional Government. President Kim Gu (金九) was thrilled that a patriotic youth in Korea who majored in Western music composes the national anthem and informs them of the national anthem. In January 1941, the Provisional Government approved Ahn Ik-tae's use of the national anthem, and the Provisional Government Bulletin (No. 69 Issue). At this time, President Kim Koo called Auld lang Syne the national anthem as'Korean national anthem' and Ahn Ik-tae's national anthem as'Korean national anthem'. They also sang Korean national anthem at the Provisional Government Protocol event.

 

3. The Liberated Motherland and National Anthem

 

end. Discuss the proposition on the flag and country

 

At the 61st plenary session on September 9, 4281 (1948), the Constituent Assembly proposed the 5th agenda, “Proposal on the National Flag and the State,” and initiated an agenda review under the chairmanship of Vice Chairman Kim Yak-soo. Rep. Jeong Gyun-sik, who first arrived on this day, expressed his opinion on the national flag and the national anthem. He said, “There is no room for a theory to designate Taegeukgi as the national flag of the Republic of Korea since the Korean national flag has inherited the spirit of 3.1 independence and has been designated as the Republic of Korea. However, the national anthem is different from the national anthem. As a nation, the lyrics were also contested nationwide, decided by the culture and arts community, and proposed to change the composition. However, Rep. Kang Wook-joong said, “In Korea, not only the Taegeukgi, but also the national anthem are almost nationalized. In order to become a symbol of the country, the national anthem must have some historical character, but our Taegeukgi and the national anthem have to be independent of Japan. It was a flag and song that the Koreans who dreamed of independence during the movement were kept deep in their hearts and in the most intimate place. “If we do not want to solve the 3.8 line problem with blood, we demanded the withdrawal of the armies of the two countries at the right time. They objected to the establishment of a new state, saying that the following must be united and resolved. Rep. Lee Ju-hyung and North Korean reactionaries criticized that “it is a state” and enacting the national flag and the state separately would hinder reunification. It was suggested that discussions on the establishment of the state should be withheld until it can be enacted. However, Rep. Kwang-ho Jung said, “The agreement that we withhold the discussion until certain conditions are fulfilled is to bind ourselves to conditions, and that it is correct not to withhold conditionally because we do not know how the situation on the Korean peninsula will change in the future. Insisted that they be discarded. Accordingly, Rep. Lee Ju-hyung withdrew the motion to withhold the proposal, and Rep. Jeong Gyun-sik, who was first explaining the proposal, withdrew, taking into account the situation of the whole National Assembly debate on this issue.

 

In the end, the Constituent Assembly agreed to use the Korean national anthem as it is until the Unification Council was formed, adopted by the provisional government by the Republic of Korea, which inherits the spirit of independence from the March 1st, and the South and North Korean compatriots share its historicity.

I. North Korea's national anthem

 

North Korea's Kim Il-Sung set up an iron curtain in the North Korean territory occupied by the Soviet Army and established a single government in North Korea as a satellite state of the Soviet Union already in 1947. In this state, Kim Il-sung gathered North Korean writers on September 27, 1946 and instructed to create a new national anthem, saying that the lyrics of the national anthem adopted by the Provisional Government did not fit the feelings of the people and were not cool with foreign songs. , And finally adopted the national anthem composed by Kim Won-gyun. However, the announcement date was decided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government in the general election on May 10, 1948. It was because of my intention to transfer the responsibility of the division of the country to the South Korean side.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government, North Korea adopted the Constitution at the first meeting of the Supreme People's Assembly on September 8, 1948, and approved the list of ministers with Kim Il-sung as the Prime Minister on September 9, and recognized the artificial flag and the national anthem. Adopted, began to call.

 

All. Ik-Tae Ahn The flow of national opinion surrounding the national anthem

 

Ahn Ik-tae's national anthem (hereinafter referred to as the Korean national anthem) was first broadcast in Korean on the Voice of the United States (VOA), which opened on August 29, 1942 with the permission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It was broadcast and repeated verse 1 every day. Also, around the time when the discussion on the national anthem ended at the Constitutional Assembly, it began to spread widely in Korea. In May 1946, the “Temporary Secondary Music Textbook” published by the secondary music textbook was published and used as a music textbook for all schools. The first song in this textbook was the Korean national anthem. The Korean national anthem has been broadcast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in 1948, and TV has been aired at the start and end times from May 1956 and from December 31, 1961 to today. Currently, the government requires the national anthem to be sung in accordance with the national anthem in the national exhibition manual.

 

4. Conclusion and future tasks

 

Musician Ahn Ik-tae has been active in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for a lifetime. However, his life in Europe was in serious economic difficulties due to World War II. His support from the American politicians who supported him was cut off, and his Japanese passport allied with Germany prevented him from returning to the United States. At this time, the only means of living he had was playing, composing, and conducting.

Now some non-mainstream native historians are stigmatizing him as a pro-Japanese molecule. This is because he was a member of the German Imperial Music Association and that he composed and performed for the 10th anniversary concert of Manchukuo in 1942. Becoming a member of the Imperial Music Association, German musician Richard Strauss evaluated Ahn Ik-tae's conducting ability and made him his disciple. He had to become a member at the time in order to live and eat in Germany as a performance activity. He was also able to win an order for composition and conduct at the 10th anniversary concert of Manchukuo, organized by the German-Japanese Cultural Association. The name of the composition he played was “Symphonic Fantasia Manju for Large Orchestra and Mixed Choir”. There was Ahn Ik-tae's music, but there was no lyrics that would be pro-Japanese. He was only a part-time job for a musician in the ruined country. Living alone in Manrita, growing up as a world-class musician and composer of the “Korean anthem” in the United States in his youthful days, Ahn Ik-tae, who put a pro-Japanese frame and put a political criterion in the realm of art, is what communist totalitarians or the Pasho regime have It's crazy to do.

 

In addition, the Korean national anthem has already left the hands of Ahn Ik-tae and became the national anthem for more than half a century. His bereaved families also donated the right to the national anthem's sound source to the Korean government. What remains for us now will be to seriously reflect on whether there is a need to change the Korean anthem to meet the demands of a new situation aiming for advancement and reunification by going beyond the task of founding and independence. <This article was also published in'Dedicated Papers'>. rh201@hanmail.net

 

*Writer/Youngil Lee

Former lawmaker (11th, 12th, 15th lawma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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