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질문서-이병철 회장이 질문하고 차동엽 신부가 답하다!

이병철 회장은 인간으로서 근원적 물음 24개를 천주교계에 전달했다는데...

이재운 소설가 | 기사입력 2019/11/13 [15:00]

삼성 창업주 이병철 씨가 폐암으로 죽기 2년 전 24개의 <인생질문서>를 작성했다. 1987년 말년의 이 회장 "인간"으로서 근원적 물음 24개를 천주교계에 전달했다. 박희봉 신부, 정 몬시뇰 거치도록 답을 내놓는 사람이 없다가 차동혁 신부가 무려 24년 만에 대답했다. 이 질문지는 1987"천주교의 마당발'로 통하는 절두산 성당의 고()박희봉(1924~88) 신부에게 전해지고, 박 신부는 이를 카톨릭계의 대표 석학인 정의채(86.당시 카톨릭대 교수) 몬시뇰에게 건넸다. 정 몬시뇰은 답변을 준비하고, 조만간 이 회장을 직접 만날 예정이었다. 그러다 이 회장의 건강이 악화됐다. "건강이 좀 회복되면 만나자"는 연락이 왔지만, 이 회장은 폐암으로 한 달 후에 타계하고 말았다. 문답의 자리는 무산됐다. 정 몬시뇰은 20년 넘게 질문지를 간직했다. 그러다가 2년 전 제자인 차동엽(53. 인천카톨릭대 교수.미래사목연구소장) 신부에게 질문지가 들어갔다. 차 신부는 "이 질문지를 깊이 파고들어가 보라.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던지는 종교적 물음과 만나게 된다"고 말했다. "이 질문지에는 지위고하도 없고. 빈부도 없다. 인간의 깊은 고뇌만 있다. 나는 그 고뇌에 답변해야 하는 사제다. 그래서 답한다고"고 말했다. 1987년 이병철 씨의 질문에 대한 2011년의 차동엽 신부의 답변이다.

 

▲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     ©브레이크 뉴스

읽어보니 질문도 답답하고 대답도 답답하다. 이것이 평생 대기업을 일군 한 재벌의 질문인가 의심스럽고, 대답 또한 유명한 신부의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 그래도 평생 거부로 산 이병철 씨의 질문인만큼 눈여겨 볼 가치가 있다.

 

G10은 임의판단이 많다는 점을 전제해야 하고, S10은 자기주도적이며 S25는 자기중심적이다.

 

문제가 있는 부분에 초록색으로 의견을 단다.

      

이병철 1010(1909.2.12) 분석 능력이 뛰어나면서 자기 주도형 코드다.

 

차동엽 1025(1958.5.31) 어포넨트, 뛰어난 창의력, 통찰력, 그러나 자기 주장이 강한 코드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우리 눈에는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공기는 있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의 영역이 정해져 있다. 가청영역 밖의 소리는 인간이 못 듣는다. 그러나 가청영역 밖의 소리에도 음파가 있다. 소리를 못 듣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고, 인간의 문제다. 신의 한계나 신의 문제가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령 개미와 코끼리를 보라. 개미는 이차원적인 존재다. 작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에겐 평면만 존재한다. 입체도 개미에겐 평면이 된다. 그런 개미가 코끼리 몸을 기어 다닌다. 개미는 코끼리 몸을 느낀다. 그러나 코끼리의 실체를 파악하진 못한다. 왜 그런가. 개미의 인식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코끼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결국 개미는 코끼리를 모르는 건가.

 

아니다. 개미는 코끼리를 느낀다. 코끼리의 부위에 따라 다른 질감을 느낀다. 신과 인간의 관계도 비슷하다. 인간도 그렇게 신을 느낀다. 우리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할 뿐이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이미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 물리학에선 우주의 차원을 11차원이라고 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너머의 차원까지 관통할 것이다. 3차원적 존재가 11차원적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겠나. 흑백TV3D컬러 영상물을 수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성경에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돼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처음 기록됐다. 그리스어로 말씀로고스(Logos)’. 로고스의 뜻이 뭔가. ‘원리. 다시 말해 존재 원리를 뜻한다. 그러니 요한복음서의 첫 구절은 태초에 존재 원리가 있었다가 된다. 우주에는 기가 막히게 섬세한 질서가 있다. 결국 그러한 존재 원리, 그리도 섬세한 질서의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거다.”

    

이병철 회장의 종교에 대한 24개 물음을 담은 질문지. A4 용지 다섯 장 분량이다.

    

그 근원은 뭔가.

 

만물의 창조주로서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신을 만날 건가의 문제다. 만나면 증명이 되는 거니까. 그럼 신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가톨릭 신학생 시절, 수업 시간에 은사 신부님을 통해 고() 최민순(1912~75) 신부님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최 신부님은 아침 수업에서 이런 시상(詩想)을 내놓았다고 한다. ‘꽃을 본다/꽃의 아름다움을 본다/꽃의 아름다우심을 본다.’ 이 구절을 듣는 순간, 제겐 충격이었다.”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 / 차동엽 신부의 개인 주장이다. 보편적인 답변일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신을 만날 건가 / 신이 있다면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과학적 대답은 '없다'이다. 마치 사주명리학처럼 팔자를 미리 정해놓고 풀이하는 건 잘못이다. 그 팔자가 어떻게 나온 건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단지 믿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만남의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만날지 느낄지 통할지 깨달을지는 신에 대한 정의가 완전히 내려진 다음에 판단할 일이다. 부분 확대, 부분 강조는 S25의 단점이다.

 

왜 충격이었나.

 

우주의 철리(哲理)가 사통팔달로 뚫리는 기분이었다. 꽃의 아름다움, 나무의 아름다움, 땅의 아름다움, 하늘의 아름다움이 모두 하나의 고백이다. 변화하는 이 아름다움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신 분이 아니면 누가 만들 수 있겠는가. 결국 한 송이 꽃을 통해서도 신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체험이 자신에겐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는 거다.”

   

-꽃을 통해서도 신을 체험 / 꽃이 피는 것은 중력(Gravity) 때문이다. 중력이 신인가? 스티븐 호킹이 그렇게 말했다. 신이 있다면 중력일 것이라고.

 

이 회장의 물음은 창조에서 진화로 이어졌다. 신의 창조와 인간의 진화는 양립할 수 있을까. 아니면 철저하게 양자택일의 문제일까. 그건 신학과 물리학이 만나는 가장 현대적인 접점이기도 하다.

      

차 신부는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150, 물리학자-신부의 열린 대화라는 대담을 중앙일보(200925일자 21, 9일자 25)에서 한 적이 있다. 차 신부는 물리학계의 거두인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와의 대담에서 신이 인간을 빚었나?”라는 물음에 소상하게 답한 바 있다. 당시 대담 내용을 끄집어내며 차 신부는 답을 이어갔다.

 

“‘하느님이 실제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이해 방식은 3차원적 사고에 갇힌 거다. 그런 생각은 신앙적으로 더 큰 잘못이다. 초월적 존재의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 사고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걸 떠나 계신 분이다.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건 단지 은유적 표현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진화의 과정을 흙으로 빚었다는 말로 축약했다고 봐도 된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지구의 환경, 우주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신이 창조한 생명체도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끝없이 진화해야 한다. 그런 진화를 인정한다. 그러나 진화론은 창조론이란 더 큰 울타리 안에 포함된 개념일 뿐이다.”

    

-신이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 / 스티븐 호킹의 주장처럼 중력이 우주의 창조 원리라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표현도 설명이 가능하다. 중력이 원자를 끌어모르고, 분자를 모으고, 이윽고 생명을 탄생시켰다. 이것이 과학이다. 다만 신은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무신론자가 늘어날까.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있다.

 

1916년 미국 과학자 중 40%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당시 조사를 했던 제임스 류바는 미래의 과학자는 무신론자 비율이 크게 늘어날 거라고 예측했었다.

 

그런데 1997년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린 연구 결과를 보면 딴판이다. 81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미국 과학자의 40%가 여전히 유신론자라고 나왔다. 81년간 과학 발전의 총량은 엄청났다. 그럼에도 신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의 비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신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의 비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 1916년과 1997년은 81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특히 두뇌과학은 1997년 이후 20년간 엄청난 결과를 이루었다. 서기전 100만년과 서기 0년 사이에는 100만년의 차이가 있지만 과학의 수준, 인지의 발달 수준으로 볼 때 아무 차이가 없다. 한국의 경우 무당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여전히 인류는 무지에 휩싸여 있었다. 1016년의 인류와 1997년의 인류가 생각하는 두뇌과학은 큰 차이가 없다. 따라서 비유 대상이 될 수 없다. 비과학적이다.

   

과학과 종교, 대립적 관계가 아닌가.

 

과학과 종교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의 섭리가 과학을 통해 더 명쾌하게 증명될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고 말했던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 ‘약간의 과학(A little science)은 사람을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더 많은 과학(More science)은 인간을 다시 신에게 돌아가게 한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의 섭리가 과학을 통해 더 명쾌하게 증명될 것 / 이에 대해 0315 알버트 아인쉬타인은 기독교는 사라지고 불교만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창조주를 믿는 것은 미신이라는 게 밝혀질 것이고, 지혜를 찾는 불교만이 존재할 것이란 의미다. 물론 깨달음 대신 귀신에 의지하는 한국불교는 사라지겠지만.

 

이 회장의 질문은 이제 하늘과 땅을 물었다. ‘신과 인간을 물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물결과 고통의 물결을 번갈아 물었다. 신이 사랑한다는데, 왜 우리는 고통스럽냐고. 신이 있는데, 왜 세상에 악인도 있느냐고. 그걸 물었다.

      

어쩌면 우리가 신을 사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바로 고통이다. 이슬람 최고의 신비주의 시인 G03인 루미(1207~1273, 잘랄 웃딘 루미)는 이렇게 말했다.

 

때로 우리를 돕고자, 그분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든지/생명이 피어난다/눈물이 떨어지는 곳이면 어디든/신의 자비가 드러난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한다. ‘신을 믿을 건가, 말 건가조차도 선택의 대상이다. 고통의 뒤에는 선택이 있고, 그 선택 뒤에는 자유의지가 있다.”

  

-‘때로 우리를 돕고자, 그분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든지/생명이 피어난다/눈물이 떨어지는 곳이면 어디든/신의 자비가 드러난다. / 여기서 '그분'만 빼면 바이오코드의 '맹가의 법칙' 그대로다.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무조건 신을 앞에 세우지만, 바이오코드는 오직 진실만 앞세운다. '그분' 즉 신을 빼면 루미의 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비참해진다

 

그러나 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생명이 피어나고,

 

눈물이 떨어지는 곳이면 어디든 자비가 드러난다.'

 

* G03(루미)은 늘어놓고 S45(이재운)는 모은다.

 

그럼 고통은 언제 오나.

 

고통은 주로 자유의지를 엉뚱하게 썼을 때 온다. 우리의 선택이 신의 섭리, 그 섭리의 궤도에서 벗어날 때 고통이 찾아온다. 그래서 고통은 일종의 경고 사인이다. 신의 섭리, 우주의 존재 원리, 그 궤도를 다시 찾으라는 신호다. 가령 불에 손을 넣으면 어떻게 되나. 뜨겁다. 고통스럽다. 그래서 재빨리 손을 뺀다. 만약 고통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손이 다 타고 만다.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올바른 궤도를 찾기 위한 신호다.”

  

-신의 섭리, 그 섭리의 궤도에서 벗어날 때 고통이 찾아온다 / 진실을 거스를 때, 무지와 욕망이 만날 때 고통이 찾아온다.

   

신이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다. 신은 자유의지를 주었을 뿐이다. 우리 같은 신부는 독신이라 잘 모르겠지만, 부부관계도 비슷하리라 본다. 어떤 부부는 상대방을 가두고 소유하려고 하고, 어떤 부부는 상대방을 믿고 자유를 준다. 최고의 사랑은 결국 상대방에게 자유를 주는 사랑이다. 그 자유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그러니 신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지 않나. 그 사랑을 엉뚱하게 쓰는 이들이 악인이 될 뿐이다.”

 

-신은 자유의지를 주었을 뿐이다 / 인간에게는 기본 프로그램인 유전자(DNA)와 편도체가 있다. 유전자와 편도체는 의 발전을 도모하는 공통의 생존프로그램이다. 바이오코드가 바로 그것이다. 바이오코드를 넘어서는, 즉 유전자와 편도체 본능을 넘어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신이 주는 것이 아니다. 바로 대뇌의 좌뇌와 우뇌가 뇌량을 통해 비교분석하여 구해낸 지혜로써 유전자와 편도체를 통제하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여기에 신이 개입할 이유가 전혀 없다.

    

“‘는 히브리어로 하타(Hata)’,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 ‘과녁을 빗나간 상태란 뜻이다. 과녁이 뭔가. 기준이다. 어떠한 기준을 벗어난 상태가 죄라는 얘기다. 우주에 깃든 섭리, 그런 섬세한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다. 그럼 신은 왜 우리가 죄를 짓게 내버려두실까. 그 역시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1000년 동안 사람의 입을 통해 구전되던 이야기를 기록한 작품이다. 이것을 짜맞추고, 모자이크해 보니 어떤 그림이 나왔다. 그 그림을 봤더니 하느님 그림이었다. 긴 세월, 여러 사람, 다양한 음성을 통해 나온 말이 어쩌면 그렇게 합치될 수 있을까. 물론 표본오차 수준의 편차도 약간 있다. 그건 성경을 기록한 사람의 어투와 성격 때문이다. ·구약성경에는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일관된 기조가 있다. 그걸 볼 때 성경의 원저자는 저 위에 계신 분이고, 성령이고, 이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입과 손과 가슴을 빌려준 것이라고 본다.”

    

-S25의 황당한 주장일 뿐이다. 성경 구약은 수메르족의 구전설화이고, 신약은 나사렛 예수의 인생을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다. 수메르족도, 예수의 제자들도 신이 아니다.

      

천주교란 과녁을 향하던 이 회장의 질문은 이제 종교라는 더 큰 과녁으로 시위를 돌렸다. 종교가 뭔가, 왜 필요한가, 영혼이란 뭔가, 각 종교는 무엇이 같고, 또 무엇이 다른가. 불과 서너 가지 질문에 종교학 개론의 뼈대가 담겨 있다.

 

벼락이나 천둥이 칠 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는다. 마취 직전, 수술대에 누운 이들도 기도를 한다. 무신론자도 슬픔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원망한다. 그래서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도 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다. 그래서 무한을 동경한다. 영원을 갈망한다. 그런 염원이 하나의 형식이 됐을 때 종교가 된다.”

    

-유한한 존재 / 인간으로서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 등 모든 생명체를 구성하는 원자와 분자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오직 쿼크 즉 소립자로 돌아갈 수도 있고, 무거운 원자가 되어 큰 분자가 될 수는 있다. 그래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종교는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인간은 영원을 찾다가 자꾸 벽에 부딪힌다. 부딪힐수록 무한에 대한 동경은 커진다. 결국 동경하던 무한성에 이란 이름을 붙인 거다. 그 무한성을 인격체로 여긴 사람들이 그걸 숭배하게 되고, 도움 받기를 청하는 거다. 자신이 그 벽을 넘어설 수가 없으니까. 결국 인간은 종교라는 터널을 통해 영원을 갈망하는 거다.”

    

그리스 철학은 유신론이 아니라 자연철학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세 가지 혼이 있다고 한다. 생혼(生魂)과 각혼(覺魂), 그리고 영혼이다. 모든 생물의 중심에 생혼이 있다고 한다. 나무나 풀에도 생혼이 있다. 나무의 수명이 다하면 생혼도 죽는다. 다음은 각혼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감각하는 동물에겐 생혼과 각혼이 있다. 그리고 사람에겐 생혼과 각혼에다 영혼까지 있는 거다. 물질계를 초월하는 생명현상, 그게 영혼이라는 거다. 영혼이 제대로 작동할 때 우리는 본래의 인간에 더 가까워진다.”

    

-미신이다.

 

크게 계시 종교와 자연 종교가 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계시 종교다. 힌두교와 불교는 자연종교에 속한다.”

    

-불교는 자연종교에 속한다 / 불교는 자연종교가 아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일 뿐이다. 불교는 믿음보다 의심을 강조한다. 불교를 자연종교라는 건 모욕에 가까운 표현이다.

 

차 신부의 설명은 간략했다. 이웃 종교에 대한 공개적인 평가라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항목이었다. 질문은 다시 천주교를 향했다. 이번에는 구원의 범위에 대해서였다. 종교가 없어도, 혹은 달라도 착한 사람들. 신은 그들을 어떻게 보는지, 이 회장은 물었다.

    

예전에는 천주교밖에는 구원이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거의 구원이 없다는 수준으로 얘기했다. 그러다 바뀌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전환점이었다. 천주교가 좀 더 합리적으로 반성하고, 성찰하고, 다른 종교의 면면을 공부해 보니 천주교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았던 거다. 그 후에 입장이 바뀌었다.”

 

어떻게 바뀌었나.

 

“‘타 종교인의 구원 여부는 신이 결정할 문제다. 우리는 모른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65년 이전에는 개신교도 다른 종교와 구분 없이 남으로 봤다. 그런데 65년 이후에는 갈라진 형제라고 부른다.”

 

앞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신하겠다. 내용이 겹친다.”

 

죽음 너머의 세계는 객관적 검증이 불가능하다. 이 물음에는 나의 주관적인 신념으로 답을 할 수밖에 없다. 이 한계를 미리 고백한다.

 

교황 요한 23세는 임종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나의 여행 채비는 다 되었다.’ 우리는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한다. 왔던 곳으로 다시 갔다는 뜻이다. 육체는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영혼은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다. 하느님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영혼의 실재도 증명되지 않았다.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강한 증거가 있나.

 

“12사도의 죽음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자발적인 죽음을 택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안드레아는 X자형 십자가에서 순교했다. 12사도가 모두 그랬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들은 죽음을 불사했을까. 답은 하나다. ‘영원한 생명은 있다.’ 이걸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12사도의 죽음이야말로 강력한 증거다.”

      

개그 프로를 보면 이 더러운 세상이란 유행어가 있었다. 불공정한 사회라는 거다. 악인이 버젓이 잘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부조리 현장에서 신이 침묵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공정 사회를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탐욕이다. 한국이 불공정 사회라면 그걸 책임지고 개선해야 할 주체는 신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다. 앞서 말했듯이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까지 기회를 주는 거다. 죽기 전에 악인이 회개할 수도 있고, 새롭게 출발할 수도 있는 거다. 여기서 우리는 오히려 신의 자비를 본다. 벌은 사후 또는 종말 때 주어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탐욕 / 그것이 바로 편도체다. 그런데 차 신부는 이렇게 말해놓고도 결국 신을 끌어들인다.

 

한국 최고의 부자가 부자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성경 속의 부자와 바늘구멍. 이 회장의 물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부자란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그건 나눔을 강조한 예수님의 메시지다. 부자에도 여러 종류의 부자가 있다. 이웃과 잘 나누는 부자가 있다면 당연히 천국에 가지 않겠나. 주위를 보라.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선택에 따라 선인이 되기도 하고, 악인이 되기도 한다. 100% 선인도 없고, 100% 악인도 없다. 부자도 늘 그런 선택 앞에 선다. 그 선택에 따라 부자는 선인이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다.”

 

이 물음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에서 직접 살아보면 상당히 질서가 있다. 물론 마피아가 있지만, 그건 극소수의 범죄집단일 뿐이다. 이탈리아 국민의 평균적 윤리의식, 그들의 기준은 엄정한 편이다. 

 

이 질문에 100% 동의한다. 다를 바가 없다. 똑같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가 어우러질 때 조화로운 신앙이 가능하다. 이 셋 중 하나가 지나치게 발달하면 몽상가나 다혈질 행동파가 될 수도 있다. 주로 오직을 강조하는 사람이 광신도가 될 소지가 많다. 오직 믿음, 오직 실천, 오직 성장, 오직 복지, 오직 우(), 오직 좌(), 오직 사랑, 오직 정의도 다 위험한 것이다. 종교든, 이념이든 보편성을 잃을 때 미치게 되는 거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가 어우러질 때 조화로운 신앙이 가능하다 / 감성과 정서는 편도체 뇌의 작용 기전이다. 이성은 대뇌 중 좌뇌 기전이다. 물론 우뇌 정보 중에도 이성이 있다. 대뇌 중 우뇌는 감성이긴 하나 편도체 감성과는 전혀 다른 '감성 정보'에 가깝다. 그리고 의지란 대뇌 좌뇌와 우뇌를 통찰하는 뇌량의 계산 결과를 가리킨다. 그러면 '조화로운 신앙'이 가능한 게 아니고 무지를 떨치고 지혜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천주교 신자가 택한 것이 아니다. 천주교에서 이탈한 무신론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거다. 공산권에서 종교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협력 관계나 우호적 관계가 아니었다.”

 

1989년에 사회주의권 몰락이 시작됐다. 이병철 회장의 질문은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기 2년 전에 던진 것이다. 질문의 시점과 답변의 시점에 시대적 시차는 있다.

 

통계청 조사를 보면 종교인의 범죄 비율보다 비종교인의 범죄 비율이 더 높다. 그나마 종교인이 범죄 수치를 낮춘 거다. 그럼에도 이 질문이 시사하는 바를 깊이 수용할 필요가 있다. 종교인이 더 사회정화 기능을 하지 못하고, 더 성숙하게 살지 못하고, 좀 이기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형식만 그리스도인이지, 내용은 안 바뀐 경우도 많았다. 빛과 소금 역할,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교황의 무오류권(무류권)을 말한다. 가톨릭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무오류권은 교황좌에서 특별한 교리, 엄중한 진리의 문제에 관해 천명할 때 무오류권을 발동한다. 주로 기준이 애매할 때 이 기준을 따르라고 천명하는 것이다. 아주 드물게 발동된다. 그러나 무오류권이 발동된 사안도 시간이 지나면 수정될 수 있다. ‘타 종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도 무오류권이 발동된 사안인데, 결국 수정했다.”

      

신부는 예수님을 대리해 양떼를 돌보는 사람이다. 1965(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만 양떼였다. 65년 이후에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양떼다. 수도원 소속인 수녀와 수사는 다 수도사다. 그들은 자신을 전적으로 투신해 영혼의 갈무리를 하는 사람이다. 신부와 수녀의 독신은 나는 여기에만 헌신합니다라는 서원이다. 기혼과 독신이 섞여 있다가 13세기부터 사제는 독신이 됐다. 수도사는 그 이전부터 독신수도 생활을 했다.”

      

이 문제는 역사성 안에서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 노동 착취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전태일씨 등은 하루 15시간 이상 노동했으니까. 그런데 모든 기업주가 착취자라고 하면 곤란하다.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는 어디나 있다. 좋은 기업인도 있고, 나쁜 기업인도 있다. 그건 개별적 사안이다.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했다. 다만 교회가 자본주의 체제의 부작용이나 폐해에 관심을 갖는 건 맞다. 거기에 약자와 소외된 자가 있기 때문이다.”

      

종말이 언제일까. 내가 죽는 날이 종말이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오메가 포인트(종말의 시점)가 있을 거다. 지구의 수명이 다하는 날이 올 테니까. 성경에는 종말이 있다고 돼 있다. 그런데 이 종말을 보는 시각이 좀 다르다. 파국만은 아니다. 구원을 위한 최종 추수의 시간으로도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갈린다. 종말을 기대하는 사람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 신앙인의 특권은 종말을 희망사건으로 본다는 것이다. 종교는 결국 종말 너머를 향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위한 최종 추수의 시간 / 지구의 수명은 있다. 생로병사를 거친다. 하지만 종말은 없다. 지구를 구성한 물질은 또 다른 별로 태어날 뿐이다. 아무도 추수하지 않는다. 이런 말은 종종 종교적 협박 수단이 될 뿐이다. 그저 물질의 순환할 뿐이다.

 

마지막 질문은 마지막에 관한 것이었다. 타계 한 달 전, 24개의 질문을 던진 이 회장에게 그 마지막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질문지는 우리에게 그걸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마지막이라 부르는 곳, 종교에선 또 하나의 시작이라고 부르는 곳. 어쩌면 마지막과 시작이 하나일지 모르는 곳. 그곳을 묵상케 한다. 동시에 이 회장의 질문은 마지막을 향해 한발씩 나아가는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 건가 하는 치열한 물음으로 되돌아온다.

 

*이병철 회장

 

 삼성 창업주인 이 회장은 1910년 경남 의령에서 출생, 87년 타계했다. 호는 호암(湖巖). 유교적 가풍의 집안에서 성장했고, 일본 와세다대에서 공부했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는 등 일제시대에 민족자본을 형성했다. 여기에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이란 호암의 지향이 깔려 있다. 평소 호암은 내가 뽑은 인재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아름답고 고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인재제일(人材第一)’사업보국은 삼성그룹의 경영철학이 됐다. 초대 전경련 회장을 역임했다.

      

호암은 타계 2년 전에 폐암 진단을 받았다. 진단 직후에 호암은 일본인 저널리스트 야마자키 가쓰히코와 만나 좋은 죽음이란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호암은 인간인 이상 생로병사를 피할 수는 없겠지요. 불치병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살아서 아등바등하는 흉한 꼴만은 남들에게 보여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라고 답했다. 그걸 듣고서 야마자키는 사는 순간까지 삶만을 생각하며,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구도자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저서에 우리가 잘사는 길』 『호암자전(湖巖自傳)등이 있고, 호암 평전으로 크게 보고 멀리 보라(야마자키 가쓰히코 지음)가 있다.

 

*차동엽 신부

  

1958년생. 서울 관악산 기슭의 달동네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지게로 연탄과 쌀을 배달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 때문에 공고에 진학했고,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 다시 가톨릭대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다. 1991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세례명은 로베르토다.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수학하고,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성서신학으로 석사, 사목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인천 가톨릭대 교수이며, 성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다. ()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차 신부의 활동을 지지한다고 말하곤 했다. 연구소 후원 계좌로 추기경이란 직함 없이 김수환이란 이름만 적어서 100만원을 입금한 적도 있었다. 이 사실은 뒤늦게 확인됐다.

 

차 신부의 대표 저서는 무지개 원리. 지금껏 150만 부가 팔린 천주교계 최대 베스트셀러다. 이 밖에 바보 Zone』 『뿌리 깊은 희망』 『행복선언등이 있다. 20대부터 간염과 간경화를 앓고 있지만 왕성하게 활동해왔다간 기능이 좋지 않던 차 신부는 20191112일에 간암으로 사망했다. 1025인 그의 제2코드는 0455. 그의 대표적인 말은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로서 S25이지만, 사실은 0455스런 말이 되었다. 그는 <무지개 원리>라는 책을 쓰고, 페이스 북과 블로그에 비슷한 제목의 글을 매일 띄웠다.

 

*필자/이재운.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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