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중국 베이징 화단 활동해온 '허달재 화백' 귀국 전시회

600년 전남 유배지에서 가업 계승으로 꽃피운 남종화 전수자

이래권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9/05/16 [10:58]

▲ 허달재 화가의 작품.    ©브레이크뉴스

▲ 허달재 화가의 작품.    ©브레이크뉴스

 

허달재 화백의 선조는 원래고려 때 귀족이었으나 조선조 광해군에 이르러 남도에 귀양살이에 처해진 이래, 출사(出仕)보다는 향토문화에 접속한 남종화란 ‘사물과 정신의 혼연일체’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호남 제일 조선 제일의 명문 화가 가문. 고려 때 본관(本貫)을 양천(陽川)을 둔 귀족가문으로 중앙정치에서 활약해오다 조선 광해군 시절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전남 진주로 유배된 이후로 시서화(詩書畵)에 전념하여 중앙정치와 거리를 둔 호남 제일의 예술가 가문인 것.

 

그후 의제 허백련 선생의 장손인 직헌(直軒) 허달재에 이르렀다. 고관대작의 가문이 출사(出仕)의 명리(名利)를 따르지 않고 조선 600년 동안 전라남도 진주를 본향(本鄕)삼아 후학을 기르고, 가업(家業)인 시서화 예술인 후손을 배출한 가문은 흔치 않다.

 

허달재 화백의 조부인 의재(毅齋) 허백련(1896~1977) 화백은 남종화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소치(小癡) 허련(1808~1893), 미산(米山) 허형(1862~1938)으로 이어지는 남종화의 맥을 계승하고 최후의 꽃을 피운 그가 1977년 작고함에 따라 남종화의 맥이 끊겼다고 한다.

 

그러나 의재 허백련의 손자이자 제자인 직헌(直軒) 허달재 화백이 가업을 전수하여 소치 허련(1808~1893)과 그의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1907~1987), 그리고 한 집안인 허백련으로 이어지는 허씨 가문의 남종화 맥을 잇고 있다.

 

1949년 건국한 중국은 초기에 소수민족 문제 다음으로 인민의 굶주림에 허덕였다. 공산주의 하에서 인민이 굶는 소위 ‘호남성 농민운동 고찰보고’를 들은 등소평은 남쪽 농경지대의 현장을 살피면서 결단한다. 소위 남족 항구들을 제한적으로 개방하여 자본주의적 성과 제일주의를 도모를 선언했다. 이후 그 비약적 결과는 시진핑 시대에 이루어졌다. 한국처럼 법조인들이 아닌 전문공학자들로 구성된 칭화대 출신이 당정군을 장악한 것. 이를 핵심 지도부로 삼아 꽌시(關係)를 매개로 소위 태자당이 결속되어 나타난다. 10여년 전, 도중(渡中)한 허달재 화백의 베이징 전시회는 이들의 입소문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아 중국 정재계 인사들이 전시회장에 줄을 이었고, 자연스레 꽌시 인맥이 확장되어 갔다. 이를 계기로 직헌 허달재 화백은 예술외교로서 수십 차례의 서화전을 북경 상해 등지에 열어 한중 예술교류에 선두적 역할을 다한 공로가 있다.

 

▲허달재 화백은 붓으로 한지에 그려낸 작품들이 중국 지도층 인사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펑리위안 여사를 비롯한 중앙상무위원 부인들과도 넓은 예술적 교류를 통하여 한중관계에 보이지 않는 신뢰의 초석을 놓았다. 중국 베이징 전시회에서 방문객에게 작품설명을 하는 허달재 화백(왼쪽에서 두번째).  ©브레이크뉴스

 

지난 2013년에 국가주석직에 오른 시진핑과 정관계 인사들과의 한중 예술교류를 통한 국격 고양 임무에 혼신의 노력과 열정을 발휘한 직헌 허달재 화백은 어느 외교관 못지 않은 한중 교류를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중이 핑퐁게임을 통하여 국교를 정상화 했다. 그런 의미와 같이 허달재 화백은 붓으로 한지에 그려낸 작품들이 중국 지도층 인사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펑리위안 여사를 비롯한 중앙상무위원 부인들과도 넓은 예술적 교류를 통하여 한중관계에 보이지 않는 신뢰의 초석을 놓았다.

 

경색된 한중관계에서 그림으로 한국의 위상을 드높인 허달재 화백은 분명 직업 외교관과 다른 문화외교를 해냈다. 그런 그가 10여 년간의 중국 생활을 잠시 접고, 고국의 미술애호가들을 위한 전시회를 이달 5월 20일~6월 8일까지 여는 의미는 호남 남종화의 명문(名門) 달화(達畵)의 극치를 감상하는 흔치않은 기회를 <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20일부터 연다.

 

▲ 허달재 화가의 조부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선생(1891~1977)은 메이지대(明治大學) 법정학을 전공했음에도 탄탄대로의 식민지 시대 관료로서의 삶을 버리고 귀향하여 오로지 차밭 운영과 시서화에 전념하여 청정한 일생을 사신 ‘조선의 기상’은 후손들에게 많은 화두를 던져줬다. ©브레이크뉴스

 

그의 가계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남도 귀양살이 600년을 참으며 오직 시서화로 화성(畵聖)을 여럿 배출한 호남 제일의 명문가(名門家)이다.  특히 조부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선생(1891~1977)은 메이지대(明治大學) 법정학을 전공했음에도 탄탄대로의 식민지 시대 관료로서의 삶을 버리고 귀향하여 오로지 차밭 운영과 시서화에 전념하여 청정한 일생을 사신 ‘조선의 기상’은 후손들에게 많은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 허달재 화가 작품.    ©브레이크뉴스

▲ 허달재 화가 작품.      ©브레이크뉴스

▲ 허달재 화가 작품.      ©브레이크뉴스

▲ 허달재 화가 작품.   ©브레이크뉴스

▲ 김정숙 여사가 허달재 화가 전시장에 보내온 축하화분.    ©브레이크뉴스

 

직헌(直軒) 허달재(許達哉) 화백 역시 조부의 가르침에 따라 차밭경영과 남종화의 맥을 잇는 붓질에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일로 매진하는 것을 보면, 만국 공통어로서의 영구불변한 예술창작 정신을 본받아 난중지생(難中之生)의 시대상황에 처한 현실을 극복하는 장인정신을 기르는데 널리 본받아야 할 것.


허 화가의 전시회는 5월 20일부터 6월 8일까지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5길 18-4(서촌지역)에 소재하는 표 갤러리에서 열린다. samsohun@hanmail.net

 

*필자/삼소헌 이래권.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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