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 진허스님

<박삼중 스님 대증언>해인사로 입산 행자생활을 하다

김성애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09/12/14 [07:06]
“그래! 해인사에서 중이 되거라! 그 놈 참 좋네! 영원한 인생, 참 좋다!” 청담스님은 연신 웃었다. “주지스님, 제가 혼자 온 게 아니라 동생도 중이 되고자 함께 왔습니다.” 그는 조심스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소년을 소개했다. “저 놈아는 약하게 생겨서 중노릇을 못하겠다. 너만 있거라!” “저 혼자만 있을 수 없습니다. 동생을 데리고 왔으니 제가 책임져야 합니다. 같이 있지 못한다면 저도 있지 못합니다. 제발 동생도 허락해 주십시오.” 삼중스님은 그 시절 자신을 쳐다보던 청담스님을 기억했다. 청담스님의 그윽한 눈에서는 당돌한 놈을 반기는 느낌이었다. “그래? 같이 있어보아라!” 청담스님의 허락으로 두 소년은 행자생활을 해인사에서 시작했다.
 
스님의 관문은 6개월 행자로서의 수련과정을 거쳐야 했다. 정식적인 계를 받아야만 승려가 될 수 있다. 행자는 절의 식구가 아닌 머슴이었다. 강제노역은 물론 고행을 달관할 정도로 인내를 요했다. 절 식구 400~500여명의 3끼를 챙기는 일은 엄청났다. 이 노역을 견디지 못하는 행자들은 쫓겨나던지 스스로 떠나야만 했다.
 
행자생활의 고된 머슴살이
 
그 당시 해인사에는 15명의 행자들이 함께 생활했다. 작은 방에 15명의 장정들이 함께 잠을 잤다. 그러니 등을 방바닥에 제대로 못 붙인 채 옆으로 자야만 했다. 잠 잘 시간이 워낙 부족한지라 어떻게 잔들 불평도 없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밤 9시까지 중노동을 했다. 큰 행사에는 밤을 꼬박 새웠다. 계를 받은 신참 중들의 행패는 대단했다. 자신들이 겪었던 행자생활에 대한 앙갚음에 모욕적인 언행까지 했다. 가장 악랄한 중은 자신의 속옷은 물론 심지어 팬츠까지 행자들의 면상에 집어던졌다

소년은 행자생활을 뛰쳐나간다 한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러니 어떤 수모라도 견뎌야만 했다. 정식으로 계만 받으면 저런 놈들과 대등해 진다는 각오로 이를 악물었다. “내 이런 고행쯤은 견디리라. 중이 되어서 장삼입고 고모 집에 가서 복수할거다.” 여전히 복수라는 꼬랑지는 살아 있었다. 그는 염불과 초발심이라는 기초수행을 제일 잘 외웠다.

▲ 삼중 스님     ©브레이크뉴스
계를 받은 신참내기 중보다 더 잘 했다. 또한 다른 행자들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 대웅전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했다.

“부처님! 살려줘서 감사합니다. 부처님을 닮은 스님이 꼭 되겠습니다.”

몇 달간 행자생활로 중들이 180도 달리 보였다. “스님은 신선이나 학이라는 생각에서 200리 길을 걸어 왔는데, 생활을 들여다보니 참으로 견딜 수 없구나! 중이 되어봤자 저런 놈들과 똑같은 밥그릇 정도일 텐데....... 그래~ 나야 중노릇하려 온 게 아니지 않느냐? 착한 사람이 되어서 복수하러 온 것이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도 흔들리기는 여전했다.
 
곪아터진 손등에 피흘러
 
해인사 절 식구 500명의 겨울 김장은 대단했다. 김장독의 크기는 그의 키와 맞먹었다. 설이 다가오자 행자들의 손등은 동상으로 곯아 터졌다. 추운 겨울날 원주스님(행자 승을 관리하는 승려)은 그에게 독에서 김치를 꺼내오라 했다. 김치에 손이 닿는 순간 손이 김치에 쩍 달라붙었다. 밤에는 두부 만들고, 엿을 끓이고, 한 두시까지 일을 했다.

한두 시간 눈을 붙였다가 다시 3시에 일어나서 새벽예불을 드려야 했다. 동상은 밤마다 괴롭혔다. 군불 뗀 방에서 자는 행자들의 손등에서는 핏물이 고였다. 잠 많던 어린 시절이라 잠이 제일 큰 고충이었다. 한 번은 큰 행사를 마친 후 새벽 1시에 잠이 들었다. 당연히 원주스님이 3시 예불에 행자들을 깨워줄 알았다. 잠깐 눈을 붙였다 했는데 추위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예불이 끝난 후였다.

방문을 열고 원주스님이 딱 버티고 서서 “너희들 모두 예불에 빠진 벌로 3천배를 당장해라!”는 명령을 했다. 3천배로 깨진 무릎에 절룩거리면서도 행자들은 다시 일을 했다. 그렇게 6개월이라는 고행의 시간은 흘렀다.

“중만 되어봐라! 내 장삼입고 제일 먼저 고모 집을 찾을 것이다!”는 열망으로 6개월을 견뎠다. 음력 삼월 삼짓날, 청담스님은 행자들에게 계를 약속했다. 장삼을 입은 중의 대열로 당당하게 큰방에서 공양의결권을 행사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해인사 운영권자의 한 사람으로 계를 기다렸다. 그런데 주지스님은 약속한 날 해인사에 내려오지 않았다. 몇 달 뒤로 계가 연기된다는 말은 충격이었다. “몇 달 뒤라니, 에잇! 도망가자! 중노릇 해가지고 누가 눈 하나 꿈적이라도 하겠냐! 고모부는 악마인데 내가 중이 되면 뭐가 달라지겠냐? 복수는 간단하다.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고등고시에 합격하는 것이다. 눈앞에서 딱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중도 만들어주지 않으니 난 돌아가겠다. 남이 볼 때는 고고한 스님처럼 보이겠지만, 그 속 알맹이는 깡패조직이나 다름없는 이 절간을 떠나자!”
 
장삼입고 서울행 도둑기차
 
도망가는 날을 잡았다. 그날도 갱두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국을 끓이는 갱두는 행자 중에서 고참자리였다. 그는 결국 도망이라는 험난한 길을 다시 떠났다. 그 시절 가야산에는 호랑이가 나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겁도 없이 가야산 정상을 타고 아래 마을에 도착했다. 밤이 어둑했다. 배가 무척 고팠다. 한 노인네가 평상에서 담뱃대를 빨고 있었다. 노인네 앞에 다가선 그는 “밥”이라는 말을 잠시 주춤거렸다.

“스님! 해가 빠졌는데 어디서 오셨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주무시고 가십시오. 저녁은 하셨는지요.” 노인네는 반겨 스님을 맞아 주었다. 절 밖에서는 행자인지 중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장삼자락이 대접을 받게 했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군불 뗀 아랫목에서 단잠을 잤다. 다음 날 김천에서 서울행 도둑 기차를 탔다. 그 시절에는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표를 검사하는 서울역을 피해 용산역에서 내렸다. 6개월 만에 초라한 회색 두루마기를 걸친 채 큰고모 집을 찾아갔다. 야박한 큰고모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선뜻 대문을 열고 들어서지 못했다. 인기척에 놀라 개가 짖었다. 큰고모는 빠끔히 대문의 틈새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아이고! 야가 중이 되었네! 아이~야야~ 이리 나와 봐라! 쯔쯔~쯔쯔!”
큰고모는 놀라서 부엌에서 일하는 며느리를 부르면서 혀를 끌끌 찼다.
“......... 그 동안 안녕하신지요?”

그는 큰고모의 외마디 비명에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이고~ 도련님, 스님이 되셨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형수는 그를 반갑게 맞았다. 반기는 며느리가 황당한 듯 큰고모는 며느리에게 눈을 흘겼다. 때맞추어 사촌형도 집안에서 나왔다.

“참 별일이네. 뭐라 어린 중놈을 그리 반가워 해! 눈꼴셔서 못 보겠네. 야~야~ 너 빨리 들어가서 너 할 일이나 해라. 어~서! 어린놈이 승복을 입고 뭐하겠다는 건지~ 쯔쯔~ 쯔쯔!”
큰고모는 혀를 차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사촌형은 쌀쌀한 어머니의 모습에 낯을 붉히면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빵장사하며 법학 공부
 
하루 밤 큰고모네 집에서 신세를 진 그는 어머니의 친구 집을 찾았다. 어머니의 친구는 그의 행색에 놀라면서 손을 잡았다.

“아니~ 어린 네가 승복을 입고 뭐하느냐? 너희 어머니는 알고 계시냐?”
어머니의 친구는 야윈 그를 안쓰러워했다.

“어머니는 모르십니다. 승복을 벗고 지금부터 장사를 해서 고등고시 공부를 할 참입니다.”
그가 찾아 온 속내를 알아차린 어머니의 친구는 장사밑천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돈을 들고 고물상과 공사장을 돌았다. 6개월 전에 이미 수레를 만든 경험이 있던 터라 반나절 만에 수레를 만들었다.

대구역에서 했던 빵 장사를 시작했다. “빵, 맛있는 빵 사세요.”는 고함소리가 클수록 빵은 잘 팔렸다. 한쪽 손에는 법률조문을 외우면서 장사를 했다. 며칠 후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역시 그의 빵 수레도 단속반에 걸렸다. 젊은 경찰은 빵 수레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육법전서를 꺼냈다.

“아니? 웬 법률 책이 이런 곳에 있어? 네가 공부하는 책이냐?”
경찰은 외로 꼬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네, 빵을 팔면서 짬나는 시간에 공부하고 있습니다.”
수레를 빼앗길 걱정에 공손히 대답했다.

“허 참! 내 이런 경우는 처음보네. 그럼 나랑 한 번 토론 좀 해보자.”
경찰은 다짜고짜 법률지식을 쏟아냈다. 그는 차분히 법 조항에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그~래~ 넌 훌륭한 법관이 되겠구나! 조리 있는 말에 내가졌다.”
경찰은 단속반에서 빵 수레를 빼내어 주었다.

“이런 환경에서 법 공부를 하는데 내가 지켜주고 싶구나. 공부나 열심히 해라.”
다음 날부터 다른 장사들이 쫒기는 난리 통에도 그의 빵 수레는 버젓이 역전을 지켰다. 그 덕에 빵도 잘 팔리고 그래서 그런지 공부도 잘되었다. 신이 났다. 그런데 어느 날 경찰서의 합동단속반이 노량진역에 들이 닥쳤다.
 
내가 설 자리는 “산”
 
빵을 팔고 있는 그에게 들이닥친 경찰은 바로 그의 후원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한 태도로 빵 수레를 내리쳤다.

“이 자식이~ 어디서 고함치면서 장사를 해!”
안면 몰수한 경찰은 그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아니, 봐 주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이러십니까?”
그는 너무도 황당한 시선으로 경찰에게 대들었다.

“이 자식이~ 니가 불법행위를 하고 있잖아! 기초질서 하나 지키지 못하면서 빵장사나 하는 놈이 무슨 놈의 법률공부야!

경찰의 이 한마디에 그는 크게 한 방 맞은 듯 심장이 멈췄다. “그래, 당신 말이 맞다. 내가 불법 장사를 하면서 무슨 놈의 법 공부냐!”라는 마음이 들었다.

단속반은 빵 수레를 뒤집으면서 멍하게 서있는 그를 거칠게 밀쳤다. 그는 그 자리에 서있었다.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생각했다. “그래, 내가 있을 자리는 산이다.” 그는 그 길로 승복을 찾으러 어머니의 친구 집에 들렀다. 승복을 갈아입고 길을 떠났다.

그는 경부선 철도를 따라 쭉 걸어 내려갔다. 어떻게 보면 목적도 없는 편한 여행길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의 모습은 스님이었다. 철도 길을 따라 오산쯤 지나니 배가 고팠다. 지나가는 길손에게 이 근방의 절을 물어 보았다.

보살이 부처님을 모시는 조그만 법당에 들어섰다. 승복을 입은 그에게 정성껏 음식을 차려주었다. 또 잘 곳을 준비했다. 그는 보살의 대접에 너무 황송할 뿐이었다. 배시시 웃는 보살의 얼굴이 부처님처럼 보였다. 다음 날 비가 내렸다. 보살은 그에게 하루 더 머물렀다가 떠나기를 권했다.
 
보살의 따스한 은덕
 
“아닙니다. 하루 신세 진 것만으로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는 하루 더 있고 싶었으나 고마운 보살에게 더 이상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신세는요? 절은 다 부처님의 것인데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보살은 그의 앳된 얼굴을 쳐다보았다.

“보살님, 죄송하지만 저는 중이 아닙니다. 계를 받지 못한 행자로 절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보살은 마다하는 그의 손에 봉투를 쥐어 주었다.

“저에게 이리 하루 밤을 대접해 주신 것도 고마운데. 이러지 마십시오.”
자존심에 그는 봉투를 거절했다.

“스님, 스님의 또래 제 자식이 생각나서 그럽니다. 내 자식한테 못 다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그러니 받아 주세요. 이 돈으로 점심 한 끼 더 사드세요.”

따스한 보살의 온정에 눈물이 고였다. 삼중스님은 몇 년 후, 승계를 받은 중의 신분으로 보살의 법당을 찾았다. 몇 시간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법당을 찾지 못한 아쉬움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고 했다.

소년은 다시 철도의 네루를 따라 걸었다. 기차가 오면 조금 비켜섰다가 다시 걸었다. 대전을 지나 추풍령 고개를 넘어서니 긴 터널이 앞을 가로 막았다. 터널을 통과하려면 20분이 족히 넘을 듯싶었다. 터널 안을 걸어가는 도중 기차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피할 곳은 없는 곳이었다. 사람들의 통행을 제한하는 철도 간수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터널을 통과하지 않으려면 산을 뺑 돌아서 넘어가야 했다.
 
터널에서 기차오면 죽자
 
그는 지나는 길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막내고모 집에서 수면제를 먹었던 기억이 새삼스레 되살아났다. 터널을 걷다가 기차가 오면 그대로 죽자는 생각이 들었다. 철도 길을 따라 깜깜한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걷기 시작한 지 한 10분쯤 지나니 터널 입구에서 기차 굉음이 울렸다.

그 소리는 아주 위협적이었다. 피할 생각이 없던 소년의 머리는 하얗게 변했다. 따갑게 작렬하는 기차의 불빛이 바로 등에 느껴지는 순간에 몸의 감각들이 반응했다. 죽음의 문에서 몸과 생각은 따로 놀았다. 몸이 옆으로 피했다. 피할 곳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 직전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때마침 그는 터널의 대피소 옆을 걸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터널에는 2미터마다 움푹 들어간 대피소가 설비되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따라 간 자리는 죽음을 비켜가게 했다. 기차는 빠른 속도로 그의 장삼자락을 스치면서 터널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은 죽음과 삶을 느끼는 한 찰나에 혼이 빠져버렸다. 그냥 빛이 보이는 곳을 향해서 터덜터덜 걸었다. 빛이 환해질수록 누군가의 고함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 왔다. 밝은 빛에 눈을 반쯤 뜨는 그에게 따귀를 올리는 사람이 있었다. “야~ 이 중놈아! 너 미쳤냐? 누구 모가지 떨어뜨릴 일 있냐?”면서 터널을 지키는 간수는 그의 멱살을 잡았다. 온갖 욕을 해대면서 철로 변에 그를 내팽개쳤다. 쓰러진 몸을 천천히 일으키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철도를 따라 걸었다.
 
수도암의 행자생활
 
그의 철도길 여행은 김천 개운사에 도착으로 끝을 냈다. 개운사의 노스님을 만나 신세를 털어 놓았다.

“스님! 저는 계를 받지 못한 행자입니다.”
개운사 노스님에게 처음부터 신분을 밝혔다.
“그래~ 그대는 어디로 향하고 있나?”
노스님은 눈빛이 맑은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절에 가서 기도를 올리고 싶습니다.”
“그래~ 거참 잘됐네! 내가 아는 수도암에서 기도할 사람이 없던 차에 잘 되었네. 그곳에서 행자 자네가 목탁을 치면 제격일 걸세.”

큰 고민거리인 숙식이 해결되는 자리라는 말에 그는 다시 삶을 붙잡았다.

수도산에 있는 수도암은 가야산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수도암은 큰 석불로 유명한 기도처였다. 경주의 석불암에 있는 부처님과 비슷한 크기의 석불이었다. 거룩한 석불이 계신 절에서 기도를 올린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주지스님 홀로 수도암을 지키고 있었다. 신도들은 종종 주지스님에게 백일기도를 청했다. 백일기도를 올려야 할 주지스님은 절 밖으로 나가면 기도는 그의 몫이었다. 신도의 돈을 받은 터라 하루에 4번씩 관세음보살 기도를 드려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위한 기도를 열심히 했다.

 “저를 빨리 중 되게 해주세요. 행자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니 하루 빨리 중 되게 해주십시오.”

새벽 3시에 일어나 목탁석에 앉아서 기도한 후 도량석 도량을 염불하면서 돌았다. 새벽에 목탁을 치면서 산중을 돌다가 호랑이에게 물려죽을 수 있었다. 이런 나날에 그의 심신에서는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다. 주지스님은 그의 마음심을 읽었던지 “그러다가 네가 부처되겠다!”는 칭찬을 듬뿍했다.

소년은 주지스님의 칭찬으로 기도를 더 열심히 했다. 암자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도 열심히 했다. 몸은 천근만근 고단하였다. 잠이 많던 어린 나이이니 새벽 예불시간이 가장 힘들었다. 그런데 새벽 3시가 되면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그 소리에 벌떡 일어나면 3시였다. 목탁을 들고 산 중을 돌아야 할 시간이었다. 누구인가? 바로 산에 사는 신선이 그를 깨운다는 기운이 들었다.
 
진허스님의 진심어린 충고
 
노스님 한 분이 수도사에서 조금 떨어진 조그만 암자에서 기거했다. 그 당시 70세, 현재 노인의 나이로 치자면 한 90세쯤 되는 모습이었다. 일본 식민지시절, 해인사의 주지를 했던 막강한 권세를 누린 노스님이었다.

경남도지사의 자리와도 맞바꾸지 않는 권세를 누렸던 진허 스님은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진허 스님은 언제나 가야산 정상을 바라보면서 꼿꼿이 앉아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진허 스님은 큰 소리로 “나무아비타불” 염불을 올렸다.

그는 노스님의 앙상한 몸에서 어떻게 저런 큰 고함소리가 나는지 의아했다. 노스님의 3끼 공양은 그의 몫이었다. 백일기도 불공이 들어올 때면 그는 과자와 사탕을 가져다 드렸다. 그럴 때마다 코끼리가 비스킷을 집어 먹듯이 깨끗해진 그릇이 놓여 있었다.   
“삼중 수자, 내 이야기를 잘 들어. 중노릇 하지 마~”

그에게 정을 느낀 진허 스님은 진심어린 가슴으로 말문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불같은 마음으로 부처되려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나도 25살 때 평양에선 도인 소리도 들어 본 사람이야. 이집 저집에서 자기 딸하고 결혼시키려 했어. 난 부처가 되려고 결혼을 하지 않았지.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스럽네. 외로워서 못살겠어. 끝까지 있어 줄 상자라는 놈도 다 떠나가고…….”
“...........”

그는 말을 잊었다. 진허스님이 25살 때라면 중들의 결혼이 허락되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해인사 주지까지 했다면서 저런 말을 하느냐는 눈으로 진허 스님을 곱지 않게 쳐다봤다.

“부처님 말씀에 '중은 무소유'라 해서 그리 평생을 지키면서 살았네. 해인사 주지를 몇 차례나 했으나 내 손에는 남은 게 없네. 이 산골짜기에서 나와 관계없는 행자가 이리 잘 대해주니, 내가 재산이라도 있다면 자네에게 주고 싶네 그려. 그런데 아무것도 없네. 후회스럽네.”
진허스님은 그에게 자신의 신세타령 속에 그를 향한 고마움을 내비치었다. 그는 갑자기 진허 스님에 대한 예전의 존경심이 말끔히 사라졌다. 

“아니 이 노스님은 이제는 중이 아니구나! 중된 도리로 장가를 가고 안 가는 것을 후회하면서 재산타령이나 하다니. 이런 짐승 같은 송장한테 날마다 밥을 해다 받쳤으니,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중의 첫 깨달음 “무소유”
 
진허 스님의 염불소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도산의 새벽을 쩌렁쩌렁 울려 깨웠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진허 스님의 염불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침 공양을 들고 그는 암자에 올라갔다.

진허 스님은 홀로 열반한 뒤였다. 방을 정리하다보니 선반 위에 보따리가 눈에 띄었다. 보따리를 내리다가 떨어뜨렸다. “꿍”하는 소리에 풀어 본 보따리에는 노스님이 남긴 유품이었다. 그 유품은 그가 드린 사탕과 과자, 유서 한 통 뿐이었다.

“삼중 수자, 참 미안하네. 이 늙은이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주었는데, 이제는 육체의 옷을 벗고 떠날 시간이네. 삼중 수자의 정성은 나에게는 고문하는 형벌이었네. 삼중 수자에게 줄 수 있는 게 고작 자네가 준 사탕과 과자뿐이네. 내 시신을 화장해 주게나.”

큰 깨달음을 준 유서였다. 이 진허 스님이야 말로 도인이구나. 염불을 힘차게 하다가 어느 날 떠났다. 노 스님의 열반을 위해 몰려오는 사람은 없었다. 세상에 빚을 지지 않고 깨끗이 떠났다. 그는 진허 스님의 다비식을 정성껏 해드렸다. 기도를 올렸다.

“당신이야말로 위대한 큰 스님입니다. 참으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노릇을 잘한 깨끗한 스님이셨습니다. 저도 스님처럼 살겠습니다.”

드디어 그는 계를 받아 중이 되었다. 진허 스님의 열반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세상의 가장 큰 권세를 누렸던 노스님의 깨끗한 열반, 진허 스님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관 뚜껑을 닫을 때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중은 바로 거지다. 부처님은 거지대장이다. 중의 계를 받은 후 첫 깨달음이었다. sungae.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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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twtywqty 2009/12/14 [13:31] 수정 | 삭제
  • 마지막 가는 길은 다 놓고 간다. 무소유의 거지 진허스님이야 말로 득도한 실천자다.
    요즘 절이나 교회목사들은 돈에 미쳐있다. 다 놓고 갈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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