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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古下) 송진우와 민족운동

이영일 전 국회의원 | 기사입력 2024/08/07 [16:37]

▲ 송진우     ©브레이크뉴스

1.들어가면서

 

대한민국 역사와 문화재단 이사장인 김형석(金亨錫) 박사는 그의 역사 인물 연구의 일환으로 1988년에는 남강 이승훈 선생(南岡 李承薰) 선생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생애를 연구, 단행본을 발간했다. 뒤이어 해방 후 독립운동지도자들 간의 노선 차이에서 비롯된 건국과정의 제반갈등을 “끝나야 할 역사전쟁‘으로 묶어 단행본을 내놓으면서 미국독립운동과정을 화합적으로 마무리한 ’건국의 아버지들‘(Grounding Fathers)개념을 우리도 응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올해 김형석(金亨錫) 박사는 국내에서만 60평 생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해방 직후에도 건국과정에서 중요역할을 하던 중 해방된 지 127일 만에 테러로 목숨을 잃은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1890~1945) 선생을 소환, <고하 송진우와 민족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저서를 발간했다. 古下 선생은 우리나라 식자들 간에는 널리 알려진 국내독립운동지도자의 한 분이다. 그러나 1980년대를 전후해서 등장한 좌파인사들이 우리 현대사를 왜곡하면서 독립운동 지도자를 보는 시각도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들 좌파에 속한 사가(史家)들은 국내에서 일본의 철권통치와 감시 속에서 힘들게 독립운동을 벌여왔던 인사들에게 때 아닌 친일파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오류를 묵인, 방치하기보다는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에서 국내 독립운동지도자중에서 古下 선생을 가장 성공적인 국내형 독립운동지도자로 재조명, 부각시키고 있다. 이하 평자(評者)는 김 박사의 연구 중 평자가 중시한 부문만을 간추려 소개하고 평자(評者)나름의 견해를 덧붙이고자 한다.

 

2. 독립운동의 유형문제

 

그간 우리 학계는 독립운동을 대강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첫째는 이승만 대통령을 대표로 하는 외교독립운동이다. 이는 일본의 강박에 의한 조선합병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세계여론에 호소, 일본의 조선 지배를 종결시키고 국제사회의 협력을 독립의 길을 트자는 노선이다. 둘째로는 무장투쟁이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국강토를 무력투쟁으로 되찾겠다는 것이다. 이상룡, 이회영, 김좌진 등이 주도했다. 셋째는 의혈투쟁이다. 안중근, 김구, 윤봉길 의사 등이 대표적이다.

 

이상 세 가지 유형 중에서 가장 실효적인 것은 어떤 투쟁이었는가. 송복(宋復)교수는 독립운동의 방법으로서 외교투쟁과 독립의 터전을 가꾸는 교육문화운동이 가장 실효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중국이나 만주 연해주 등지를 무대로 전개되었던 무장투쟁이 일본의 만주침략과 중일 전쟁과정에서 얼마나 참담하게 소멸되어 갔고 의혈투쟁도 국민의 독립정신을 일깨우는데 기여한 공로는 다대했지만 독립의 실효를 얻지는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카이로 선언을 가져온 외교투쟁과 국내에서 독립국가 건설의 정신적 토대를 지키고 길러온 교육문화운동이야말로 실로 값진 독립에의 기여로 보았다.(계간 철학과 현실지 2023년 송년호에 실린 ”나의 살아온 길“중에서 참조) 송 교수의 견해는 아직 국내학계의 통설은 아니다.

 

평자가 이를 중시한 까닭은 식민지 시대에 일제가 강요한 한글폐지, 창씨개명을 받아들여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화의 길로 갔다면 과연 우리의 독립이 가능했겠는가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식민지 독립운동의 정치명분이 민족주의 일진데 민족주의의 존립명분은 혈연, 역사, 언어, 문화의 공통성 유지다.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핵심이 역사적 운명공동체의식, 언어의 동일성, 문화의 공통성을 지키는 것이라면 내선일체를 강요하는 일제에 맞서서 민족의 얼을 지키는 교육문화운동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독립운동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선생의 큰 족적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국내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간고한 투쟁에 나섰던 국내 독립운동보다는 해외독립운동을 더 높게 보았다. 또 교육문화 분야에서 활동한 지도자들보다는 무력투쟁이나 의혈투쟁을 펼친 인사들을 크게 떠받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이런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다. 그가 국내자료를 집대성해서 집필한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이하 古下로 약칭함) 선생은 식민지 치하에서도 온 국민이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살아가도록 하는데 앞장섰던 지도자였음을 모든 사료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송진우(古下)는 우선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선생과 함께 언론기관으로 동아일보를, 교육기관으로 중앙학교를 설립했다. 나아가 고등교육기관으로 민립대학창설운동에도 동참했다. 인촌 선생이 국가의 정신적 토대를 쌓는 교육문화운동의 하드웨어를 만들었다면 송진우(古下)는 민족의 정체성을 살려 나갈 소프트웨어를 만든 장본인이었다. 송진우(古下)는 한국사에서 그가 존경하는 인물로 단군,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의 세 분을 들면서 동아일보 지면을 이용, 이분들의 정신과 업적을 국민의식으로 내면화시키는데 주력했다. 육당 최남선을 통해 단군신화를 살리는 불함문화(不咸文化)론을 체계화시켰고 춘원 이광수로 하여금 이순신 장군일대기를 소설로 동아일보에 장기 연재시켰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의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 찍힌 일장기를 신문사진에서 말소시켜 당대에 큰 풍파를 일으켰고 동아일보는 정간 당했다. 또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충남 아산의 현충사를 복원하고 충무공 정신을 선양하는 추모사업을 꾸준히 이어왔다.

 

또 송진우(古下) 선생의 공헌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1919년 3.1독립운동을 총체적으로 제작, 감독한 설계사였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제국주의 세력들에게 국권을 박탈당한 전 세계약소민족들에게 독립에의 꿈을 블러 일으켰다. 그러나 윌슨의 주장은 결과로 보면 유럽대륙의 백인 약소민족의 독립을 염두에 둔 제한된 메시지였다. 그러나 당시 강대국으로 떠오르는 미국 대통령의 주장이었기 때문에 그 파급은 전 세계적이었다. 당시 한국의 지식인들도 국내외에서 독립의 호기로 보았다. 2.8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이나 4월 14~16일까지 2박3일간 지속된 이승만 중심의 필라델피아의 독립시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송진우(古下)는 한반도 전체 민중들이 모두 나서서 독립운동의 주체가 되도록 전체 한민족 궐기의 독립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설계하고 집행하였다. 1919년 3월 1일 행사는 표면상으로는 민족대표 33인이 주동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 뒷면에서 전민족적 궐기를 작동시킨 15인의 실질적인 운동가들이 있었다. 고하는 33인과 함께 구속, 수감되어 옥중에서 갖은 악랄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의 다이소(大正)천황이 데모크라시를 실시한다면서 3.1독립만세운동에 대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만을 적용하고 언론인 등 이면에서 활동한 사람들을 단순 동조자로 분류, 처벌하지 않기로 판정함에 따라 투옥된 지 12개월만에 무죄로 출감했다. 이때 함께 풀려나온 인사들 가운데는 함태영(咸台永) 제3대 부통령도 포함된다. 따라서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는 이들 15인까지를 합한 48인으로 보는 것이 정답이다. 古下는 일제 치하에서 실로 네 차례 경찰에 체포되고 세 차례 구속당한 후 모진 고문을 받고 도합 27개월 옥중에서 고생한 국내 독립운동의 가장 실천적 지도자였다.

 

4. 맺는 말

 

▲필자/ 이영일 전 국회의원. ©브레이크뉴스

국내 일부 좌경 사학자들은 정부 수립 4반세기가 훨씬 지난 1980년 후반에 갑자기 자기들이 무슨 권리나 있는 것처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일부 인사들을 지목, 친일파로 매도했다. 일본을 따르면서 일본에 아첨하던 친일파 군상은 8.15해방과 동시에 사라져버린 친일파 논쟁을 다시 일으켰다. 이것은 6.25남침 실패로 설 자리를 잃은 좌파들이 자기들이 민족진영인사인 양 재기할 명분을 삼기 위해 고의로 친일파 재조(再造)에 나선 결과다. 이것은 좌경정권의 등장과 궤를 같이한다. 해방 40년이 지난 후 ’반민족행위자 진상조사에 관한 특별법‘을 갑자기 제정, 이 법으로 인촌 김성수 선생 등 독립유공자들을 친일파로 몰아 서훈까지 박탈했다. 언어도단이었다.

 

김형석(金亨錫) 박사의 ’고하 송진우와 민족운동‘은 비록 단행본이지만 국내에서 전개된 반일 독립운동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올곧게 웅변하고 있다. 지면 관계로 많은 설명이 누락되었지만 현대사를 바로 알고 싶은 분들에게 필독을 권한다.<이 글은 필자가 대한민국 헌정회 발간의 헌정지 2024년 9월호에 기고한 글이다.>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Goha (古下) Song Jin-woo and the National Movement

-Former National Assemblyman Lee Young-il

 

1. Introduction

 

Dr. Kim Hyung-seok (金亨錫), the chairman of the Korean History and Culture Foundation, published a book in 1988 as part of his research on historical figures, studying the life of Mr. Namgang Lee Seung-hoon (南岡 李承薰) as an independence activist. Following this, he published a book that combined the various conflicts that arose from differences in the paths of independence movement leaders after liberation into a “historical war that must end,” and argued that we should also apply the concept of the “Grounding Fathers,” who harmoniously concluded the American independence movement, drawing attention from the academic world.

This year, Dr. Kim Hyung-seok (金亨錫) summoned Mr. Goha Song Jin-woo (古下 宋鎭禹, 1890-1945), who led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Korea for 60 years and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process of founding the country immediately after liberation but lost his life in a terrorist attack just 127 days after liberation, and published a book titled “Goha Song Jin-woo and the National Movement.” Mr. Goha is a widely known leader of the domestic independence movement among intellectuals in our country. However, as leftist figures who emerged around the 1980s distorted our modern history, the way we view independence movement leaders also began to change. These leftist historians are trying to frame pro-Japanese figures who fought for independence in Korea under Japan’s iron fist and surveillance without proper timing. The author of this book, rather than condoning and neglecting these errors, is reexamining and highlighting Mr. Koha as the most successful domestic independence movement leader among the leaders of the domestic independence movement, with a sense of mission to correct them. Below, the reviewer will briefly introduce only the parts of Dr. Kim's research that the reviewer emphasized and add his own opinion.

2. Type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Until now, our academic world has roughly divided the independence movement into three types. The first is the diplomatic independence movement represented by President Syngman Rhee. This is a line that defines Japan's forced annexation of Korea as illegal, appeals to world opinion, and seeks to end Japan's rule of Korea and open the way to independence through cooperation with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e second is the armed struggle. It is to reclaim the homeland that was colonized by Japan through armed struggle. Lee Sang-ryong, Lee Hoe-young, Kim Jwa-jin, and others led the movement. The third is the bloody struggle. Representative examples include Ahn Jung-geun, Kim Gu, and Yun Bong-gil.

Among the three types, which struggle was the most effective? Professor Song Bok (宋復) said that diplomatic struggles and educational and cultural movements that cultivated the foundation for independence were the most effective method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He pointed out that the armed struggles that took place in China, Manchuria, and the Maritime Province were miserably annihilated during Japan’s invasion of Manchuria and the Sino-Japanese War, and that the bloody struggles greatly contributed to awakening the spirit of independence among the people, but did not achieve the actual effect of independence. He considered the diplomatic struggle that led to the Cairo Declaration and the educational and cultural movements that protected and fostered the spiritual foundation for building an independent nation in Korea to be truly valuable contributions to independence. (Refer to “My Life Path” in the 2023 year-end issue of the quarterly Philosophy and Reality magazine) Professor Song’s view is not yet the general opinion of the domestic academic community.

The reason the critic emphasized this is because he wondered whether our independence would have been possible if we had accepted the abolition of Hangul and the change of names forced by the Japanese during the colonial period and taken the path of so-called Naeseonilche (內鮮一體). The political justification for the colonial independence movement was nationalism, and the justification for the existence of nationalism is the maintenance of commonality in blood relations, history, language, and culture. If the core of preserving national identity is the consciousness of a historical community of destiny, the identity of language, and the commonality of culture, then the educational and cultural movement that protects the soul of the nation against the Japanese who enforced Naeseonilche is the most important independence movement.

3. The Great Footsteps of Song Jin-woo (古下 宋鎭禹)

Since liberation, we have regarded the overseas independence movement more highly than the domestic independence movement that fought a arduous struggle to preserve the national identity within the country. It is also true that those who engaged in armed struggle or bloody struggle were greatly respected rather than leaders who were active in the field of education and culture. The author did not go along with this trend. All the historical materials prove that Mr. Song Jin-woo (hereinafter referred to as Mr. Song Jin-woo), whom he compiled and wrote by collecting domestic data, was a leader who took the lead in ensuring that all the people preserved their national identity and lived even under colonial rule. First, Song Jin-woo (고하) established the Dong-A Ilbo as a media outlet and Joongang School as an educational institution together with Mr. Inchon Kim Seong-su (仁村 金性洙). He also participated in the movement to establish private universities as higher education institutions. If Mr. Inchon created the hardware for the educational and cultural movement that laid the spiritual foundation of the nation, Song Jin-woo (고하) was the mastermind behind the software that would revive the national identity. Song Jin-woo (古下) mentioned the three figures he respected in Korean history, Dangun, King Sejong, and General Yi Sun-sin, and focused on internalizing their spirit and achievements into the national consciousness by using the pages of the Dong-A Ilbo. Through Yukdang Choi Nam-seon, he systematized the theory of non-conformity culture (不咸文化) that revived the Dangun myth, and had Chunwon Lee Gwang-su serialize the life of General Yi Sun-sin in the Dong-A Ilbo for a long time. He caused a great stir at the time by removing the Japanese flag on the uniform of Son Gi-jeong, who won the gold medal in the marathon at the Berlin Olympics, from the newspaper photo, and the Dong-A Ilbo was suspended. He also restored the Hyeonchungsa Shrine in Asan, Chungcheongnam-do, which enshrines General Yi Sun-sin, and continued the memorial project to promote the spirit of Chungmugong.

Another important contribution of Song Jin-woo (古下) is that he was the designer who comprehensively produced and supervised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The 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 advocated by U.S. President Wilson gave rise to dreams of independence for weak peoples around the world who had been deprived of their national sovereignty by imperialist powers. However, Wilson’s argument was a limited message that aimed to secure the independence of weak white peoples in Europe. However, since it was the argument o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which was emerging as a major power at the time, its impact was global. Korean intellectuals at the time also saw it as an opportunity for independence both at home and abroad. Examples include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by the Tokyo Students on February 8th and the Philadelphia Independence Demonstration led by Syngman Rhee that lasted for two nights and three days from April 14 to 16. However, Song Jin-woo (古下) planned, designed, and executed the Independence Manse Movement, a nationwide uprising of the entire Korean people, so that all the people of the Korean peninsula would come forward and become the main force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March 1, 1919 event was apparently led by 33 national representatives, but behind the scenes, there were 15 actual activists who triggered a nationwide uprising. He was arrested and imprisoned with 33 others, and was subjected to all kinds of brutal torture in prison. However, at the time, Emperor Taisho of Japan, while implementing democracy, decided to apply only the ‘Law on Assembly and Demonstration’ to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and to classify journalists and others who worked behind the scenes as mere sympathizers and not punish them, so he was released after 12 months of imprisonment as innocent. Among those released at that time was the 3rd Vice President Ham Tae-young. Therefore, it is correct to consider the 48 national representatives who led the March 1st Movement, including these 15 people. Koha was the most practical leader of the domestic independence movement, who was arrested by the police four times, detained three times, and suffered severe torture and imprisonment for a total of 27 month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4. Conclusion

Some leftist historians in Korea suddenly began to criticize some figures who led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Korea as pro-Japanese collaborators in the late 1980s, more than 4 and a half centuries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as if they had some kind of right. The pro-Japanese group that followed Japan and flattered Japan revived the pro-Japanese collaborator debate that had disappeared with the August 15 Liberation. This was the result of the leftists who had lost their ground due to the failure of the June 25 Invasion deliberately attempting to recreate pro-Japanese collaborators in order to use it as an excuse to revive themselves as nationalists. This coincided with the emergence of the leftist regime. 40 years after liberation, the Special Act on the Investigation of Anti-National Activities was suddenly enacted, and with this law, independence activists such as Inchon Kim Seong-su were branded pro-Japanese and even their honors were stripped away. It was a blatant utterance. Dr. Kim Hyung-seok's 'Goha Song Jin-woo and the National Movement', although a single volume, eloquently argues the necessity and legitimacy of the anti-Japanese independence movement that took place in Korea. Although many explanations are omitted due to space constraints, I recommend this as a must-read for those who want to know modern history. <This article is an article contributed by the author to the September 2024 issue of Constitutional Journal published by the Constitutional Society of the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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