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왈리(Mawāli)는 Mawla의 복수형으로 종속민을 뜻하며 아랍어로 ‘주인, 보호자’ 를 뜻하는 말이기도 한다. 또 정관사를 붙여서 ‘신(神)’ 을 말할 때도 있으나, 역사상의 용어로는 그 반대로 ‘보호받는 낮은 신분인 자’ 를 뜻하고 있다. 마왈리는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사회에서는 해방된 노예의 개종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에 마왈리의 개념이 정점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마르 2세(Umar Ⅱ, 717~720) 때 였는데 가장 먼저 우마르 2세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왈리의 처지에 영합하여 아라비아 부족과 아라비아 제국의 통일성을 지속하는 데 있었다.
때문에 우마르 2세는 연달아 재정 조치를 취하여 마왈리의 환심을 얻으려고 애썼다. 이들 마왈리들은 본래 이들은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이집트, 베르베르 및 다른 비(非) 아라비아 계 개종자였다. 또한 아라비아 계통이지만 그리스도교도나 유태인들도 이에 해당되었다. 이는 처음부터 그들이 알라를 숭상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왈리는 들은 아라비아 계 무슬림을 우대하는 정책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비(非) 아라비아 계 무슬림들이 이러한 불만과 시위, 폭동에 대거 참여하였다. 이러한 시위, 폭동, 반란 등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시아파와 비(非) 아라비아 계 무슬림들이 후일 독립하여 자립하는 근거와 명분을 만든 셈이 되었다. 물론 비(非) 아라비아 계가 개종해서 무슬림(이슬람 교도)이 되는 것도 이 무와라트(Muwarat)를 통해서이며, 소위 마왈리 문제는 이러한 비(非) 아라비아 무슬림의 증가에 의해서 일어난 문제였다.
정복지의 비(非) 아라비아 주민의 개종은 무함마드 시대부터 있었는데 이는 아라비아를 통일하자마자 외부로 정복전쟁을 펼쳤기 때문이다. 특히 본 연구자가 주목했던 부분은 아라비아 부족 간의 긴장과 제국 내의 마왈리 문제였다. 아라비아 부족 간의 긴장은 아라비아 국가의 국력을 약화시켰던 주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아라비아인 스스로 제기한 것으로 아라비아인들은 비(非) 아라비아인들을 차별함으로써 아라비아 만의 특권을 그대로 가지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마왈리들의 불만은 시아(Shi‘ah), 알리의 당(Shi‘at ‘Ali)으로 알려진 종교 운동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나타났다. 시아파는 알리와 그의 후손들이 칼리프 위를 주장함에 따라 기존의 수니파들이 중심으로 한 아라비아 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했다. 7세기 말 무슬림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정복지 인구의 대다수가 비(非) 아라비아 계로 분류되면서 이들의 사회 진출에 대한 개혁이 적극적으로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이러한 개혁 중 하나가 당시 아랍어를 동등하게 수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랍어가 발달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으로는 아랍어가 꾸란의 언어라는 인식이 보급되어 비(非) 아라비아 계 이슬람 개종자들이었던 마왈리(Mawāli)들이 아랍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됨으로써 아랍어가 정복지에 널리 전파되었다.
압바스 왕조가 벌인 정치 운동의 특성들 중의 하나가 그 운동 과정에서 대부분 페르시아 출신이었던 마왈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압바스 왕국의 초기 칼리프들이 자신들의 보좌관으로 페르시아인들을 등용했다. 그럼으로 인해 아랍어는 이와 같은 압바스 왕조 정책의 모델이 되어 각 이슬람 국가들에서 마왈리들이 중용되었다.
딤미는 이슬람 법이 다스리는 국가에서 무슬림이 아닌 국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딤미라는 용어는 점령지의 주민 개개인의 삶과 재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의 의무에 관련한 것으로서 무슬림이 지배하는 국가에 대한 충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개념이었다. 딤미의 지위는 무슬림 통치자와 비(非) 무슬림 공동체 간의 협정으로 결정되었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일종의 계약이었다.
말하자면, 딤미는 계약의 백성을 뜻하는 아흘 알 딤마(Ahl al-Dhimma)라는 단어로 나타나며, ‘너그럽게 관용을 받은’ 이라는 뜻의 종파(Tolerated sects)였다. 이들은 이슬람의 우위와 이슬람 국가의 지배를 인정하고, 이어서 일정한 사회적 제약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슬람법에 따라 고율의 인두세 지즈야(Jizya)와 토지세 하라즈(Kharaz)를 납부하며 무슬림의 집단행사에 방해만 하지 않으면 보호받을 수 있게 했다.
딤미는 죽음을 면한 것에 대한 대가 또는 무슬림이 정복한 영토에 살게 된 것에 대한 대가라고 여겨지는 인두세 납부로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받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또한 그들은 거의 전적으로 그들의 법률에 따라 그들의 법정에서 재판받았다. 무슬림들이 보기에는 이슬람 율법은 그들에게 적용하기에는 매우 신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예배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개인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딤미는 시민권과 지역사회 문제에서 많은 제한과 제약을 받았다. 비(非) 무슬림은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는데 그러한 조건의 대신 세금을 내고 신변을 보호받았다. 그들은 옷과 안장의 유형, 말을 타는 방법 등에 대해 많은 차별적인 규제를 받았으며 이러한 차별의 이유로 딤미는 무슬림보다 열등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수가 미미했지만 거대한 부를 축적하여 경제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이들 중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은 최고위 공직에는 오를 수 없었지만 이슬람 제국의 정부, 특히 행정 분야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지위의 가장 하위 계층에는 노예가 존재했다. 중동에서 나타나는 노예 제도는 이슬람이 탄생하기 수세기 전부터 존재했다. 물론 이슬람 사회에서 무슬림은 노예가 될 수 없었지만 노예들은 이슬람교도가 되어도 노예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던 단점이 존재했다.
이러한 노예 제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는 것이 첩 제도다. 신분 계층의 가장 하위 개념이자 여성과 관련된 부분에서 주인과 노예와의 혼인은 허용되지 않았고 이러한 차별 속에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주인에게 소속되어 자유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 율법에 따라 노예 여성의 자식은 그 노예의 남자 소유자가 그를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대로 노예가 되었다. 한편 자유로운 신분의 여성과 노예 남성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자유민이 되었다. 주인에게 아들을 바쳐 팔려갈 수 없게 된 노예 여성은 그 아들의 어머니로 특별한 인증을 받았으며, 주인이 죽었을 때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우마이야 왕조 치하에서 노예무역은 번창한 사업이었다.
대부분의 노예는 승리한 전투나 기습, 원정에서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그러나 정규적인 노예 거래를 통해 사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부유한 아라비아 무슬림들이 수천의 노예를 거느리는 경우도 흔했다. 아라비아 인과 외국인의 융합을 가져온 노예화 과정에서 노예무역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시사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칼리프였던 우마르 2세의 당면 과제는 제국의 분열적 요소를 제거하여 제국의 안정을 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불만이 많은 마왈리들을 달래어 이들이 적대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일련의 재정적인 조치를 취하게 된다. 아라비아 군대에 속하여 전투를 벌이는 마왈리에게는 연금을 주었다. 그리고 이슬람의 원칙상 딤미는 새로운 교회나 유대교당을 짓는 것이 금지되며 굴욕적인 차별이 불가피했지만 그들의 열악한 처지를 이해하고 지위를 향상시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우마르 2세가 마왈리에 대한 개혁으로 세출은 늘어나고 세입은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의 후계자인 야지드 2세(Yazid Ⅱ: 720~724)와 히샴(Hisham: 724~743)은 새로운 재정 체제를 마련해야 했다. 이 새로운 재정 체제는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약간의 수정은 있었지만 오래 존속되었다. 그것은 이슬람 개종자는 인두세는 내지 않아도 되지만 토지세는 계속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후기 우마이야 왕조의 새로운 세제에 의하면 토지는 절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며 하라즈를 납부하는 것이 기본 전제라는 것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십일조만 내던 토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또한 증가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종래까지 하라즈만 부담한 딤미들은 인두세도 함께 납부해야 했다. 이슬람 성법(Shari‘a)의 법체계가 된 이 새로운 세제는 과세의 근거 자료로 인구와 재산을 조사해 세금을 징수하는 임무를 가진 재정관을 총독과는 별도로 임명함으로써 더욱 큰 효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수정과 개혁에서 출발하여 20년에 걸친 히샴의 치세는 재정적으로 다소 의기소침해진 분위기에서 제국을 회복시켰다. 이에 대한 법치의 확립은 북서쪽의 국경이 견고해졌고,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처럼 투르크 부족들의 침입으로 포기되었거나 베르베르 인의 반란이 있었던 마그리브(Magrib)와 같은 영토들에서 무슬림의 지배가 재확립되었다. 이로 인해 군비가 강화되고 재정체계가 더욱 견고해지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딤미는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 유지가 허용된 이교도들을 의미하고 있다. 본래 이 딤미는 ‘성서의 추종자’인 아흘 알 키탑(Ahl al-Kitab)과 동일한 개념이었다. 성서의 추종자는 본래 기독교도와 유대교도 등이 있었다. 이들은 마호메트 이전에 계시를 받아 신의 계시를 일부만 받았기 때문에 불안전한 ‘경전의 사람들’ 이었다. 또 성서의 추종자로 간주되지 않는 조로아스터교도(Zoroaster)들인 페르시아 인들에게도 관용을 보여 편의상 딤미의 개념에 포함시켰다. lukybaby7@gmail.com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Islam spread throughout the Middle East and became Arabized
-Jeong Gil-seon, columnist
Mawāli is the plural form of Mawla, meaning dependent, and is also an Arabic word meaning ‘master, protector’. There are also times when the definite article is added to say ‘God,’ but in historical terms, it means the opposite, ‘a person of low status who is protected.’ In pre-Islamic Arabian society, mawali also meant the conversion of freed slaves. The concept of Mawali reached its peak during the reign of Umar II (717-720). The first thing Umar II had to do was to accommodate the situation of Mawali and maintain the unity of the Arabian tribes and the Arabian Empire. It was there.
Therefore, Umar II tried to win Mawali's favor by taking financial measures one after another. These Mawali were originally Persian, Armenian, Egyptian, Berber and other non-Arabic converts. Also, although they were of Arabian descent, Christians and Jews also fell into this category. This is because they did not worship Allah from the beginning.
Because these Mawali were dissatisfied with the policy of giving preferential treatment to Arab Muslims, non-Arab Muslims participated in these complaints, protests, and riots in large numbers. Although these protests, riots, and revolts failed, they created the basis and justification for Shia and non-Arab Muslims to later become independent and self-reliant. Of course, it was through this Muwarat that non-Arabians converted and became Muslims (Muslims), and the so-called Mawali problem was a problem caused by the increase of non-Arab Muslims.
Conversion of non-Arab residents of the conquered areas has been happening since the time of Muhammad, because as soon as Arabia was unified, wars of conquest were launched to the outside world. In particular, what this researcher paid attention to was the tension between Arabian tribes and the Mawali problem within the empire. One of the major problems that weakened the national power of the Arabian nation was the tension between the Arabian tribes, which was raised by the Arabians themselves, who tried to retain the privileges of the Arabian Gulf by discriminating against non-Arabians.
Due to this situation, the discontent of the Mawali became closely associated with the religious movement known as Shi‘ah and the party of Shi‘at ‘Ali. The Shiites claimed equal rights with the existing Sunni-dominated Arabs, as Ali and his descendants claimed the caliphate. As the Muslim territory expanded at the end of the 7th century, the majority of the population of the conquered areas was classified as non-Arab, and it became necessary to actively reform their social advancement.
One of these reforms was to allow equal study of Arabic at the time. Another factor that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the Arabic language was the spread of awareness that Arabic was the language of the Quran, which gave Mawāli, non-Arabic converts to Islam, the opportunity to learn Arabic, allowing Arabic to be introduced into the conquered territories. It was widely disseminated.
One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Abbasid dynasty's political movement was that the Mawali, most of whom were from Persia,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movement, and the early caliphs of the Abbasid kingdom appointed Persians as their aides. As a result, Arabic became a model for the policies of the Abbasid dynasty, and Mawali was used in each Islamic country.
Dhimmi refers to a non-Muslim citizen in a country governed by Islamic law. The term dhimmi was a concept created based on loyalty to a Muslim-dominated state, as it related to the state's obligation to guarantee freedom of life, property, and religion for each resident of the occupied territory. The status of dhimmi was determined by agreement between the Muslim ruler and the non-Muslim community, but in essence it was a kind of contract.
In other words, the dhimmis are represented by the word Ahl al-Dhimma, meaning people of the covenant, and were Tolerated sects, meaning ‘generously tolerated.’ They recognized the supremacy of Islam and the rule of the Islamic state, and subsequently accepted certain social restrictions. Also, according to Islamic law, people can be protected as long as they pay the high Jizya poll tax and Kharaz land tax and do not interfere with Muslim group events.
Dhimmis were guaranteed the security of their lives and property and protected from invasion by foreign enemies by paying a poll tax, which was considered compensation for avoiding death or for living in Muslim-conquered territory. They were also tried in their own courts almost entirely according to their own laws. This appears to be because, in the eyes of Muslims, Islamic law is too sacred to apply to them. They were allowed to worship in their own way and to live their personal lives as they wished.
However, dhimmi faced many restrictions and restrictions in terms of citizenship and community issues. Non-Muslims were not allowed to possess weapons, but they had to pay taxes to protect themselves. They were subject to many discriminatory regulations regarding clothing, types of saddles, and how to ride horses, and because of this discrimination, dhimmis were thought to be inferior to Muslims.
And although their numbers were small, they accumulated enormous wealth and exercised economic power. And although among these, Jews and Christians could not hold the highest public office, they were able to play significant roles in the government of the Islamic Empire, especially in the administrative field. At the lowest level of this social status were slaves. Slavery in the Middle East existed for centuries before the birth of Islam. Of course, Muslims could not be slaves in an Islamic society, but slaves had the disadvantage of not being able to escape slavery even if they became Muslims.
The most prominent feature of this slavery system is the concubine system. At the lowest level of the class hierarchy and related to women, marriage between a master and a slave was not permitted, and amid this discrimination, children born between masters and slaves could belong to the master and become free people.
However, according to Islamic law, the child of a slave woman became a slave unless the male owner of the slave recognized him as his own child. Meanwhile, a child born between a free woman and a slave man became a free person. A slave woman who sacrificed her son to her master so that he could not be sold received special recognition as that son's mother, and when her master died she was finally able to gain freedom. The slave trade was a thriving business under the Umayyad dynasty.
Most slaves were obtained as trophies from victorious battles, raids, or expeditions. However, there were many cases where slaves were purchased through regular slave trade. It was common for wealthy Arabian Muslims to have thousands of slaves. It is suggested that the slave trade played a very important role in the process of enslavement that brought about the fusion of Arabians and foreigners. In this situation, the immediate task of Caliph Umar II was to stabilize the empire by eliminating divisive elements in the empire.
He had to appease the disgruntled Mawali and prevent them from growing into a hostile force. To achieve this, he takes a series of financial measures. Pensions were given to Mawali who fought in the Arabian army. And according to Islamic principles, dhimmis were prohibited from building new churches or synagogues, and humiliating discrimination was inevitable, but they understood their poor situation and made efforts to improve their status.
Because Umar II's reforms to Mawali increased expenditures and decreased revenues, his successors Yazid II (720-724) and Hisham (724-743) had to prepare a new financial system. This new financial system survived, with some modifications, long after the fall of the Umayyad dynasty. It was that converts to Islam did not have to pay the poll tax, but they had to continue to pay the land tax.
According to the new tax system of the late Umayyad dynasty, land was never an individual's property and payment of haraz was maintained as a basic premise. The land on which only tithes had been paid until now remained the same, but was not increased. Therefore, dhimmis who had previously only had to pay haraj had to pay poll tax as well. This new tax system, which became the legal system of Islamic Shari'a, is thought to have achieved greater effectiveness by appointing a fiscal officer, separate from the governor, who was responsible for collecting taxes by surveying population and property as the basis for taxation. .
Beginning with these revisions and reforms, Hisham's 20-year reign restored the empire from a somewhat depressed financial atmosphere. The establishment of the rule of law solidified the northwest border and re-established Muslim rule in territories such as Transoxiana, which had been abandoned due to invasions by Turkish tribes, or where Berber rebellions had occurred, such as the Maghrib. This had the effect of strengthening the military and making the financial system more robust.
Dhimmi refers to pagans who are allowed to maintain their cultural identity. Originally, this dhimmi was the same concept as Ahl al-Kitab, ‘follower of the Bible.’ Followers of the Bible originally included Christians and Jews. They were the ‘people of the scriptures’ who were unstable because they received only part of God’s revelation before Muhammad. They also showed tolerance towards the Persians, who were Zoroastrians, who were not considered followers of the Bible, and included them in the concept of dhimmi for convenience. lukybaby7@gmail.com
*Writer/ Jeong Gil-seon.
Novatopos member, historian, archaeological anthropologist, columnist, research professor at the Institute of Eurasian Archeology and Anthropology of the Russian Academy of Sci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