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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숨겨진 유고 내전의 잔혹사

알려지지 않은 모스타르 학살

정길선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4/05/25 [05:02]

▲ 필자/정길선 박사     ©브레이크뉴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서남쪽으로 129㎞ 떨어진 곳에는 아름다운 중세 고도(古都)인 모스타르(Mostar)라는 도시가 있다. 모스타르는 크로아티아어로 ‘오래된 다리’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네레트바 강이 가로질러 나간다. 네레트바 강을 사이에 두고 양측에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이 산다. 그리고 이를 연결시켜주는 스타리모스트(Starimost)라는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는 일명 "평화의 다리"로 불리며 현재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현재 이 다리는 복원된 상태이지만 원형 다리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1566년 모스타르를 점령하고 만들었다. 

 

오스만투르크가 자랑하던 토목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 다리는 높이 57m에 길이 4m, 폭 4m로 당시까지만 해도 단일 다리로는 발칸반도 뿐만 아니라 유럽을 넘어 전세계에서도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다리는 1990년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전쟁이라는 아픈 역사의 상징으로 남았고 학살이라는 비극의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물론 현재도 네레트바 강과 스타리모스트를 사이에 두고 무슬림과 카톨릭이 양분하여 살고 있다. 1993년부터 진행된 모스타르 학살을 알려면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전반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1980년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이끌던 요시프 티토가 사망한 이후, 유고 내 각 구성국들에서는 민족주의적 운동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중앙 정부는 유고슬라브인 통합주의자들이 밀려나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등의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들에게 장악되기 시작했으며, 유고 연방을 구성하던 각 구성국가들도 주 민족의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둑세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이처럼 유고슬라비아 내 민족주의는 중앙 정부의 통제권을 완전히 벗어나게 되면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도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을 위주로 독립하여 새로운 연방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은 독립에 반대했다. 

 

그러자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을 합치면 64% 정도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인구의 과반이 넘기 때문에 세르비아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민투표를 통해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물론 세르비아인들은 국민투표를 보이콧했고, 이미 세르비아인이 장악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저지하려 했다. 이에 따라 독립을 희망하던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은 상호간의 암묵적인 동맹을 맺고 세르비아인들의 무력 토벌에 맞섰다. 이것이 보스니아 내전의 전말이다.

 

그런데 보스니아 전체 영토를 보면 스르브스카와 보스니아를 제외한 나머지 헤르체고비나 주에는 확고한 주 민족이 없었다. 대개 카톨릭을 믿고 있는 크로아티아계가 주류였다. 그 중 모스타르는 크로아티아계 헤르체고비나인들이 장악한 도시지만 무슬림들이 반 정도 존재했던 곳이기도 했다. 이처럼 하지만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의 동맹은 어디까지나 강대한 세르비아인에 맞서기 의해 맺어진 동맹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두 민족 사이의 관계 역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독립 직후에는 세르비아계가 매우 강력했기에 자신들도 세르비아 민병대에 학살당할 것을 우려해서 서로 동맹을 맺고 세르비아인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있어서는 보슈냐크인들 역시 세르비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척결해야 할 존재였다.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민족 구성 비중은 보슈냐크인 50%, 크로아티아인 15%, 세르비아인 35%로 크로아티아인은 보슈냐크인에 비해 열세였지만,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과의 대립에 있어서는 크로아티아인이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보슈냐크인과 다르게 크로아티아인에게는 강력한 배경이 되어줄 수 있는 독립국 크로아티아가 있었고 그 배후에는 나토와 미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독립국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이끌었던 프라뇨 투지만과 그가 만든 정당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은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 이전부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영내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라는 지부를 세웠다. 이 지부는 보통 모스타르와 디나르알프스 산맥의 험준한 지대에 주로 게릴라처럼 머물고 있었으며 민주연합당은 후에 보슈냐크인 정당인 민주행동당과 함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독립을 일구어 내긴 했지만, 세르비아인 세력을 몰아내고 나서 각자가 장악한 지역을 두고 상호 지역 간의 통제권과 곳곳에서 게릴라 전투를 벌이며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크로아티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이 많은 지역에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동체(Hrvatska Zajednica Herceg-Bosna)를 선포하여 보스니아 정부들과 보슈냐코 무슬림들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인들은 주 거주지인 헤르체고비나 지방을 넘어 보슈냐크계가 다수를 차지하는 중부 보스니아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보슈냐크계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하는 등 제노사이드를 벌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처럼 보슈냐크인들에 비해 수적으로 불리한 크로아티아인이 보슈냐크인들을 학살할 수 있었던 것은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의 지원이 있었고 앞서 언급한대로 나토와 미국이라는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투지만의 크로아티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크로아티아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해 영토를 확장하고 싶어했다. 이때 투지만은 보슈냐크계에 대한 지원을 끊고 오히려 보슈냐크 무슬림들을 공격하는 크로아티아인들을 지원하게 된다. 크로아티아 역시 독립 때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신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공격을 받아 전력적으로 열세였고 매우 불리한 처지였다. 

 

우선 1992년에 크로아티아와 신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휴전이 성립되고 난 이후 1992년에 투지만은 신유고슬라비아의 밀로셰비치 대통령 및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라도반 카라지치 대통령과 함께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보슈냐크인들을 인종청소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를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의 것으로 분할하자는 그라츠 조약(Treaty of Graz)에 합의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4차의 시기로 1차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전쟁, 2차 세르비아-보스니아 전쟁 (일명 보스니아 내전), 3차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 (일명 헤르체고비나 내전), 4차 세르비아-코소보 전쟁 (일명 코소보 전쟁)으로 분류가 된다. 

 

이 중 보스니아 내전이 심각해지자, 1992년 8월에는 보스니아를 민족별로 3개 공화국으로 재편하는 내용의 중재안인 오웬-스톨렌텐베르그(Owen-Stollentenberg) 안이 제시되었다. 이에 크로아티아인들은 여기에 동의하고 1993년에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동체를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Hrvatska Republika Herceg-Bosna)으로 승격하면서 전쟁을 여기에서 마무리 짓고자 했다. 그러나 보슈냐크인들과 세르비아인들은 오웬-스톨렌텐베르그 안을 거부했다. 보슈냐크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영토에서 3개 체제로 갈린다는 것은 언제든 다시 내전에 휩싸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이유였다.

 

세르비아인들은 본래 스르브스카가 세르비아의 영토였고 세르비아인들이 절대다수 지역이었기에 스르브스카를 보스니아 영내에 둘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오웬-스톨렌텐베르그(Owen-Stollentenberg) 안이 파기되었고 보슈냐크인들은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대한 정식 국가로 인정을 거부했다. 그리고 보슈냐크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면서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의 동맹은 완전히 결렬되었면서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에서는 양측 사상자가 1만 명 이상이 나왔는데 62%가 보슈냐크인이었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는 각각 24%, 13%로 집계되었다. 이 전쟁 중에 크로아티아인들은 보슈냐크인들을 대거 학살했는데, 이 크로아티아인들을 지원한 크로아티아의 독립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도 전쟁 범죄자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은 1993년 9월, 세르비아 민병대와 사라예보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상황에서 발생했던지라,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슈냐크 모두 서로 죽고 죽이면서 사상자가 엄청나게 불어나게 된다. 

 

당시 보스니아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군대는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이면서도 헤르체그 보스니아의 점령지 상당 부분을 수복했다. 당시에 보슈냐크인들은 크로아티아 정부와 미국, 나토에 지원 받는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인들에 비해 좋은 무기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공격을 할 때 가족을 인질로 잡고 협박하여 항복을 강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디나르알프스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산악전에서 승부를 보던 보슈냐크군이 승전을 거듭하면서 전세는 크로아티아한테 불리해졌다. 

 

그러자 1993년 10월부터 크로아티아인들은 모스타르, 제니차 등 헤르체그 보스니아 점령지 내 보슈냐크인들을 대량 학살하여 보슈냐크 군에 두려움을 심어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슬림들에 대한 학살은 헤르체그 보스니아에 대한 국제 여론 악화만을 불러 일으켰다. 더불어 모스타르에서는 슬로보단 프랄략의 주도로 크로아티아의 선제 박격포 포격을 했다. 이 때 포격을 받은 스타리모스트 다리는 붕괴되었다. 모스타르의 크로아티아계 지구인 둠(Dum) 에서 쏘아대는 박격포 포탄은 보슈냐크 무슬림 지구인 마졸리체(Mazoljice) 지역에 계속 떨어졌고 기록에 의하면 총 967발이 적중되었다고 하며 9개의 모스크가 파괴되었다. 

 

이후 둠(Dum) 지역의 크로아티아 민병대들은 네레트바 강을 건너 마졸리체(Mazoljice) 지역에 들어가 무슬림들이 보이면 무조건 사살했다. 이에 마졸리체(Mazoljice) 의 보슈냐크들은 민병대를 조직했고 크로아티아 민병대와 맞서 싸우면서 한 조직원들이 네레트바 강을 우회해 둠(Dum)  지역에 들어가 크로아티아계에 대한 보복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모스타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극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크로아티아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고 마침내 보슈냐크인은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에서 우위에 섰다. 

 

1994년 3월이 되자 헤르체그 보스니아는 헤르체고비나 주 이 외의 영토를 모두 상실했고, 헤르체그 보스니아의 수도로 선포했던 모스타르까지 보스니아 군이 장악하게 되면서 잔인한 학살극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이 때, 모스타르의 주민 3만 7천 명 중, 2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왔으며 그 중 6,400명이 사망했다. 모스타르의 건물은 집 9채, 모스크 2개, 성당 1개를 제외하고 모두 초토화 되었을 정도로 참혹했다. 이 모스타르 학살은 유고 내전 3대 학살(부코바르, 스레브레니차, 모스타르)에 들어간다. 그러나 스레브레니차를 제외하고 부코바르와 모스타르 학살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다. 

 

크로아티아가 철수하면서 모스타르 학살에 대한 자료들은 상당수를 파기해버렸고 크로아티아나 보슈냐크가 서로 보복학살을 했던 끔찍한 몇 안 남은 자료들은 모두 사라예보 고문서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한편 크로아티아인들과 보슈냐크인들을 모두 지원해주던 미국은 크로아티아인이 모스타르에서 보슈냐크인들을 학살한 사실에 놀라 투지만 대통령을 워싱턴 D.C.로 불러내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즉각 멈출 것을 요구했다. 당시 막 출범한 EU 역시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대통령을 브뤼셀로 소환해 크로아티아의 제노사이드를 규탄하고 헤르체그 보스니아의 보스니아 반환을 요구했다. 

 

투지만 대통령과 크로아티아 정부는 미국과 EU의 압력에 굴복해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고, 1994년 7월 워싱턴 협정과 스플리트 협정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이 수립되면서 보스니아 내전의 또 다른 전쟁인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은 일단락 되었다. 한편 모스타르 학살의 주범 슬로보단 프랄략은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유고전범재판소 법정에 섰다. 그는 20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이를 "사기!"라고 소리치며 주머니에 든 작은 병의 액체를 마셨다. 그리고 그는 “나는 방금 독약을 마셨다”고 외쳤다. 재판은 중단됐고,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이 장면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면서 세계인들의 경악을 불러왔다. 이날 10~25년 형을 받은 6명의 전범은 모두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로 모스타르에서 학살을 한 혐의자는 프랄략 외에도 3명이나 더 된다. 비록 이 학살 사건이 세르비아계에 비해 규모는 적었지만 크로아티아계 역시 민족청소,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공식인정을 한 것이 이날 판결의 핵심이었다. 이날 재판에서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스스로 녹음해 두었던 방대한 대화와 통화 녹음 테이프를 통해 투지만이 헤르체그 크로아티아 군에게 돈과 차량, 무기 및 군 지휘관을 지원한 배후였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후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은 명목상 그 뒤로도 존속했지만 정부로써의 의미를 상실했고 1996년에 완전히 해체되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내 각 주로 개편되었다. 헤르체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주요 지도자들은 2000년대에 차례대로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되어 민족 학살에 대해 유죄를 인정 받고 복역하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에서 살고 있는 크로아티아인들 중에서는 헤르체그 보스니아 공화국을 보스니아 내 구성국으로 다시 부활시키자는 움직임이 있다. 

 

세르비아인들도 스르브스카 공화국을 인정하여 1국가 2체제로 살고 있는데 크로아티아계라고 스르브스카 같이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분리 독립에서의 과정으로 볼 때 당시 보스니아 내전이라는 엄청난 재앙의 기억이 아직 선명하고, 미국과 러시아 및 EU 등의 강대국이 개입해 전쟁을 가까스로 봉합한 데이턴 협정을 파기하거나 또는 데이턴 협정 자체를 전면 수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다. lukybaby7@gmail.com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Croatian-Bosnian War, the hidden cruel history of the Yugoslav Civil War

 

-Jeong Gil-seon, columnist

 

129km southwest of Sarajevo, the capital of Bosnia and Herzegovina, is the beautiful medieval city of Mostar. Mostar means ‘old bridge’ in Croatian and is crossed by the Neretva River. Bosnjaks and Croats live on both sides of the Neretva River. And there is a bridge called Starimost that connects them. This bridge is also called the "Bridge of Peace" and is currently registered as a UNESCO cultural heritage site. This bridge is currently in a restored state, but the circular bridge was built by the Ottoman Empire when they occupied Mostar in 1566. 

 

This bridge, which shows the essence of the civil engineering technology that the Ottoman Turks were proud of, is 57m high, 4m long, and 4m wide, and until then, it was said to be the largest single bridge not only in the Balkan Peninsula, but also in Europe and the world. And this beautiful bridge remained as a symbol of the painful history of the war between Croatia and Bosnia in the 1990s and became the stage for the tragic historical event of massacre. Of course, even now, Muslims and Catholics live in a divided state with the Neretva River and Starimost in between. To understand the Mostar massacre that began in 1993, you must know the entire Croatian-Bosnian war. 

 

After the death of Josip Tito, who led the Socialist Federal Republic of Yugoslavia in the 1980s, nationalist movements began to emerge in each member country of Yugoslavia. The central government of Yugoslavia was pushed out by Yugoslav integrationists and began to be taken over by Serbian nationalists such as Slobodan Milosevic, and in each of the member countries that made up the Yugoslavia, politicians who advocated nationalism for the main ethnic groups were gaining influence. seized power. As nationalism in Yugoslavia completely escaped the control of the central government, public opinion emerged in Bosnia and Herzegovina, mainly among Bosniaks and Croats, that they should become independent and create a new federation. However, Serbs opposed independence. 

 

Then, since Bosniaks and Croats combined accounted for more than half of the popula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 about 64%, independence from Yugoslavia was declared through a referendum despite opposition from Serbs. Of course, Serbs boycotted the referendum and attempted to block Bosnia and Herzegovina's independence with the support of the Yugoslav People's Army, which was already controlled by Serbs. Accordingly, the Bosnjaks and Croats, who hoped for independence, formed a tacit alliance with each other and resisted the armed subjugation of the Serbs. This is the full story of the Bosnian civil war.

 

However, looking at the entire territory of Bosnia, there was no established ethnic group in Herzegovina except for Srbska and Bosnia. The majority were Croatians who believed in Catholicism. Among them, Mostar was a city controlled by Croatian Herzegovinians, but it was also a place where Muslims existed about half. However, the alliance between Bosnjaks and Croats was ultimately an alliance made to fight against the powerful Serbs, and as time pass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peoples also began to deteriorate. In addition, immediately after independence, the Serbs were so powerful that they had no choice but to form alliances and fight against the Serbs for fear of being massacred by the Serbian militia. 

 

For the Croats, the Božnaks were people who needed to be eradicated just like the Serbs. At the time, the ethnic composi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 was 50% Bosnaks, 15% Croats, and 35% Serbs. Although Croats were inferior to Bosnaks, Croats were able to have the upper hand in the conflict between Bosniaks and Croats. . This is because, unlike the Božnyaks, there was an independent country called Croatia that could serve as a strong background for the Croats, and behind it were NATO and the United States.

 

Meanwhile, Franjo Tudjman, who led the independence of independent Croatia, and the political party he founded, the Croatian Democratic Union, established a branch called the Croatian Democratic Union of Bosnia and Herzegovina in Bosnia and Herzegovina even before the independence of Croatia and Bosnia and Herzegovina. This branch usually stayed as a guerrilla in the rugged terrain of Mostar and the Dinaric Alps. Although the Democratic Union Party later worked with the Bosnjak party, the Democratic Action Party, to achieve independence for Bosnia and Herzegovina, after driving out the Serb forces, each party took control of the area. They came into conflict with each other, fighting for control over each region and fighting guerrilla battles in various places. 

 

Accordingly, Croats in Bosnia and Herzegovina declared the Herceg-Bosnian Croat Community (Hrvatska Zajednica Herceg-Bosna) in areas with many Croats, seeking independence from the Bosnian government and Bosniako Muslims. And as the Croats expanded their power beyond Herzegovina, their main residence, into central Bosnia, where the Bosnak majority resided, they began to commit genocide by massacring or expelling Bosnak residents. However, the reason why the Croatians, who were numerically disadvantaged compared to the Bosnjaks, were able to massacre the Bosnjaks was because of the support of Croatian President Franjo Tudjman and, as mentioned earlier, the background of NATO and the United States.

 

Tudjman's Croatia wanted to expand its territory by taking complete control of the Croatian areas in Bosnia and Herzegovina. At this time, Tudman cut off support for the Bosnjak community and instead supported the Croats who were attacking the Bosnjak Muslims. Croatia was also attacked by the New Federal Republic of Yugoslavia during the Yugoslav Civil War at the time of independence, and was outgunned and in a very disadvantageous position. 

 

First, after the ceasefire between Croatia and the Federal Republic of New Yugoslavia was established in 1992, Tudjman, along with President Milosevic of New Yugoslavia and President Radovan Karadzic of Republika Srbska, carried out ethnic cleansing of the Božnyak people in Graz, Austria. They agreed to the Treaty of Graz, which divided the territory of Bosnia and Herzegovina into Croats and Serbs. The Yugoslav civil war was divided into four periods: the 1st Serbian-Croatian War, the 2nd Serbian-Bosnian War (the so-called Bosnian Civil War), the 3rd Bosnian-Croatian War (the so-called Herzegovina Civil War), and the 4th Serbian-Kosovo War (the so-called Kosovo War). ) is classified as. 

 

Among these, as the Bosnian civil war became more serious, the Owen-Stollentenberg plan, an arbitration plan to reorganize Bosnia into three republics by ethnic group, was presented in August 1992. The Croats agreed to this and sought to end the war here by promoting the Croat Community of Herceg Bosnia to the Croat Republic of Herceg Bosnia (Hrvatska Republika Herceg-Bosna) in 1993. However, the Bosnjaks and Serbs rejected the Owen-Stolentenberg plan. From the Boschnyaks' perspective, the reason was the anxiety that their territory being divided into three systems could lead to civil war again at any time.

 

The reason for the Serbs was that Srbska was originally Serbian territory and the Serbs were an absolute majority area, so Srbska could not be placed within Bosnian territory. Ultimately, the Owen-Stollentenberg plan was abandoned, and the Bosnjaks refused to recognize the Bosnian Croat Republic of Herceg as a formal state. And as the Bosnjaks regarded the Croats as their enemies, the alliance between the Bosnjaks and Croats completely broke down, further intensifying the Croatian-Bosnian war. 

 

In this Bosnian-Croatian war, there were more than 10,000 casualties on both sides, 62% of whom were Bosnjaks, while Croats and Serbs accounted for 24% and 13%, respectively. During this war, Croatians massacred Božnaks, and Croatia's independence hero and first president Franjo Tudjman, who supported these Croats, was criticized as a war criminal. The Bosnian-Croatian War broke out in September 1993, when a fierce battle was taking place between the Serbian militia and Sarajevo. As Croats, Serbs, and Bosnjaks all killed each other, casualties increased significantly. 

 

At the time, Bosnia's Aliya Izetbegovic's army regained much of the occupied territory of Herceg Bosnia while waging war against Serbia. At the time, the Bosnjaks did not have much better weapons than the Herzegovina Croats who were supported by the Croatian government, the United States, and NATO, so when attacking Croatians, they used a strategy of taking their families hostage and threatening them to force them to surrender. The battle turned against Croatia as the Boschnak army, which had been competing in mountain warfare by taking advantage of the rugged mountains of the Dinaric Alps, continued to win victories. 

 

Then, starting in October 1993, Croats attempted to instill fear in the Bosnjak army by mass murdering Bosnjaks in the Bosnia-occupied areas of Herceg, including Mostar and Zenica. However, these massacres of Muslims only worsened international public opinion against Herceg Bosnia. In addition, in Mostar, Croatia launched a preemptive mortar bombardment led by Slobodan Pralhak. At this time, the Starimost Bridge, which had been shelled, collapsed. Mortar shells fired from Dum, a Croat district in Mostar, continued to fall on the Mazoljice area, a Boşnyak Muslim district, and according to records, a total of 967 shells were hit, destroying 9 mosques.

Afterwards, Croatian militias from the Dum region crossed the Neretva River and entered the Mazoljice region, unconditionally killing any Muslims they saw. Accordingly, the Boşnyaks of Mazoljice organized a militia and fought against the Croatian militia. One member of the organization bypassed the Neretva River and entered the Dum region and began carrying out revenge massacres against Croats. As the murders taking place in Mostar became known around the world, public opinion toward Croatia deteriorated, and the Bosnjaks eventually gained the upper hand in the Bosnian-Croatian war. 

 

By March 1994, Herceg Bosnia lost all territory outside the state of Herzegovina, and the brutal massacre finally came to an end as the Bosnian army took control of Mostar, which had been declared the capital of Herzeg Bosnia. At this time, out of the 37,000 residents of Mostar, more than 20,000 people suffered casualties, of which 6,400 died. It was so devastating that all buildings in Mostar were completely destroyed except for 9 houses, 2 mosques, and 1 cathedral. This Mostar massacre is one of the three major massacres of the Yugoslav Civil War (Vukovar, Srebrenica, and Mostar). However, apart from Srebrenica, the Vukovar and Mostar massacres are relatively unknown. 

 

When Croatia withdrew, much of the material about the Mostar massacre was destroyed, and the few remaining horrific materials about the revenge massacres between Croatia and Bosnjak were all transferred to the Sarajevo Antiquities Library. Meanwhile, the United States, which had supported both Croats and Bosnjaks, was alarmed by the fact that the Croats had massacred the Bosnjaks in Mostar, and summoned President Tudjman to Washington D.C. and demanded an immediate end to support for the Bosnian Croat Republic of Herceg. The EU, which had just been launched at the time, also summoned Croatian President Tudjman to Brussels to condemn the genocide in Croatia and demand the return of Herceg Bosnia to Bosnia. 

 

President Tudjman and the Croatian government gave in to pressure from the United States and the European Union and stopped supporting the Bosnian Croat Republic of Herceg, and in July 1994, the Washington Agreement and the Split Agreement established the Federa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 leading to another civil war in Bosnia. The Bosnian-Croatian War came to an end. Meanwhile, Slobodan Pralhak, the main culprit of the Mostar massacre, appeared in court at the International Tribunal for War Crimes in The Hague, Netherlands. He was sentenced to 20 years in prison, but he shouted "Fraud!" and drank liquid from a small bottle in his pocket. And he exclaimed, “I have just drunk poison.” The trial was halted, and he was taken to the hospital, where he eventually died. 

 

This scene was broadcast live around the world, shocking people around the world. The six war criminals who were sentenced to 10 to 25 years in prison on this day were all Bosnian Croats, and in addition to Pralyak, there were three more who were suspected of carrying out the massacre in Mostar. Although the scale of this massacre was smaller than that of the Serbs, the key point of today's ruling was the official recognition that the Croats also committed ethnic cleansing, war crimes, and crimes against humanity. At the trial on this day, Croatian President Tudjman proved that he was behind providing money, vehicles, weapons, and military commanders to the Herceg Croatian army through extensive conversations and phone call tapes recorded by Croatian President Tudjman. 

 

Although the Bosnian Croatian Republic of Herceg continued to exist in name, it lost its meaning as a government and was completely disbanded in 1996, reorganized into each province within the Federa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 In the 2000s, key leaders of the Bosnian Croat Republic of Herceg were handed over to the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Yugoslavia one after another, found guilty of genocide, and are serving sentences. Even after the end of the Bosnian Civil War, there is a movement among Croats living in current Bosnia and Herzegovina to revive the Bosnian Republic of Herceg as a constituent state within Bosnia. 

 

Serbs also recognize the Republic of Srpska and live under one country, two systems, but they argue that Croats should be part of Srbska. However, looking at the process of independence, the memory of the enormous disaster called the Bosnian Civil War at the time is still vivid, and great powers such as the United States, Russia, and the EU intervened to abolish the Dayton Agreement, which barely ended the war, or completely revise the Dayton Agreement itself. It is not receiving much response because it can lead to situations where it has to be done. lukybaby7@gmail.com

 

*Writer/ Jeong Gil-seon. 

 

Novatopos member, historian, archaeological anthropologist, columnist, research professor at the Institute of Eurasian Archeology and Anthropology of the Russian Academy of Sciences.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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