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소아시아라 불리는 아나톨리아 고원 일대, 그리고 유럽과 연결되어 있는 이스탄불과 인근 그리스 지역은 과거에 로마 제국의 영향에 있었고 동, 서로마가 갈라진 이후, 동로마로 알려진 비잔틴 제국에 속해 있었다. 비잔틴 제국이 여명기에 접어들 무렵 셀주크투르크 제국, 룸 술탄국, 오스만투르크 제국 등이 끊임없이 일어나 비잔틴 제국과 끝없이 반목하며 전쟁을 벌여 왔다. 특히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의 군대가 참패하고 1204년 제4차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플이 유린당하며 쇠망하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14세기 이래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를 점령하면서 1453년 비잔틴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트레비존드 제국까지 합병당한 뒤, 헬레니즘의 후예인 그리스 세계 전역이 투르크족의 판도 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 시기는 그리스의 역사상 최악의 암흑시대로 분류되었으며 이후 간헐적으로 독립의 움직임이 몇 차례 있었지만 오스만투르크의 막강한 군대에 의해 대부분 진압되어 독립의 의지가 꺾인 채 무려 500년 가까이 투르크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속지정책은 근대화된 식민 제국과의 비교에서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에는 어렵다. 처음부터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전근대제국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시행한 발칸과 그리스 지역의 지방 정책은 상위 행정 단위와 하위 행정 단위로 나뉘는데 보통 상위 행정은 중앙에서 파견한 총독들이 통치하고, 하위 행정은 현지의 유력 세력들의 자치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그리스 독립전쟁 직전까지 발칸 지역은 투르크에 충성을 바치늕 그리스인 군주가 통치하는 지역들도 있었고 현지의 유력 집안인 그리스인 상인이나 귀족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전근대 제국들이 비슷한 상태이지만,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의 신민이자 계급적 통치제에 놓여 있었으며 특히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신분은 군인 및 관료, 성직자들인 아스케리(Askeri)와 평민인 라야(Rayah), 노예인 쿨(Kul)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오스만투르크의 법에 의하면 라야나 쿨은 물론이고 아스케리조차 술탄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기에 철저한 계급적 통치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 영내에서 반란이 발생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그 반란 주체가 누구든 똑같이 가혹하게 진압했다.
군벌과 제국 내 향토 유력 세력들이 자치를 하고 있는 곳이 많았고 그들은 지방에서 강한 군대와 지역 경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반란을 방치하거나 대충 처리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근간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잔혹하게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전근대 이슬람 국가들이 모두 그러한 것과 같이 민족적인 관점으로만 보고 차별한 것이 아닌 종교적인 관점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나누는 계급제를 두어 차별했는데, 오스만투르크의 팽창 시기 및 성장기로 나타나는 15세기 중엽까지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차별이 심하다고 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으나 오스만투르크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17세기 이후부터는 차별의 수준이 달라지게 된다. 특히 이슬람 딤미들에게 거두어들이는 인두세인 지즈야와 하라지(Haraji)는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여 가면 갈수록 비(非) 무슬림들의 부담을 가중시켰으며, 이와 같은 투르크의 인두세를 버티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산발적인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 정부는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종교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동안 유럽 정교회 세계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교회를 용인해 왔던 오스만투르크 정부는 반란이 잦아지자 반란의 정신적 구심이 정교회에 있다 생각하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들은 코스탄티니예에서 추방되거나 살해당하기 시작했으며, 일반 무슬림들이 이교도들을 살해하는 것은 처벌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묵인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국 박해를 견디다 못한 비(非) 무슬림들은 상당수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타국으로 빠져나가기에 이르렀으며, 그 결과 상당수 정교도 지식인층은 이탈리아로 망명했으며 농민이나 상공업자들은 헝가리나 독일, 러시아, 폴란드 등으로 유출되었다. 그러자 그리스와 발칸지역은 지속적으로 쇠락하여 숫자가 상당수 줄어들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중심은 러시아로 옮겨가 오늘에 이르게 된다. 17세기에 이르러 카파도키아의 그리스인 정교도들은 개종이나 추방 등으로 대부분 사라지고 무슬림인 투르크 인들로 주민들이 대체되었으며, 그리스인들의 영향력이 비교적 강했던 시노페와 트라브존 등의 흑해 연안 폰투스 지역도 18세기에 이르면서 역시 투르크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20세기 터키-그리스 전쟁 시기에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에서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시노페, 에게 해 제도, 카스타모누, 삼순 같은 몇몇 해안 지역들에 분리된 상태로 남아있었으며 이 지역들마저도 전쟁 후 인구 교환으로 인해 그리스로 넘어간 에게 해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그리스계는 완전히 사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멸망 당시까지 발칸에 대단히 집착했는데, 아무래도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고 유럽 열강들과 국경을 마주하면서 경제적으로 유럽 열강들과의 거래로 인한 수입이 많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당장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쇠퇴하기 이전까지 중용된 재상이나 주요 대신들을 보면 그리스나 발칸 지역 출신이 아닌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범투르크연합이 발족되는 19세기 투르크 민족주의의 시대 이전까지는 현 그리스 영토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을 두고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조차도 규정하기가 애매한 개념이었다. 앞서 로잔 조약을 체결할 당시 당시 인구를 교환 하기로 합의를 봤지만, 그리스 지역에서의 민족 구분은 혈통이나 출신 지역이 아닌 종교로 인한 구분 뿐이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에서는 발칸 지역에 거주하는 동방 정교회를 믿는 모든 민족들을 모두 로마인이라는 뜻의 '룸'(Rum)이라고 불렀으며, 당시 그리스인들도 스스로를 '로메이'(Ρομαίοι)라고 불렀다. 이 뜻 모두 '로마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자신들의 민중들을 민족 불문하고 '로마인'이라고 불렀던 비잔틴 제국 시대의 용례에서 유래된 것으로 비잔틴 제국이 건재하던 시절에는 단순하게 '국가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었던 '로마인'이란 단어가 비잔친 제국의 멸망 이후에는 비잔틴 백성의 절대다수가 정교회 신도였다는 점에 기인했기 때문에 이를 '종교적인' 개념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이는 오스만투르크 시대에는 민족이나 모국어가 어디든 관계없이 오로지 종교만을 가지고 로마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했기 때문에, 그리스인뿐 아니라 루마니아인과 불가리아인 등도 정교회 신자라면 모조리 '룸'이라고 불리던 시절이 존재했다. 마찬가지로 무슬림은 투르크인, 쿠르드인, 알바니아인, 심지어 개종한 그리스인까지 모두 무슬림이라고 불렀으며 민족의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근대 루마니아, 불가리아인, 터키인 등의 민족 개념이 생겨난 것은 그리스의 독립 이후 여기에 크게 자극 받은 남슬라브 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이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독립 이후 그리스 본토에 살고 있던 알바니아인 및 정교회를 믿는 투르크계 주민들이 그리스 정부에 의해 그리스화 정책으로 인해 동화되는 부분도 마찬가지로 이는 민족주의적 영향 하에 이루어졌지만, 이는 종교적인 부분과 별개의 부분으로 인식해야 한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19세기 초, 강력한 서양 열강의 동방 문제에 의한 지원으로 인해 그리스는 마침내 독립하게 된다. 이 때부터 터키와 그리스 양국의 대립은 점점 더 강해졌으며 1850년대부터 양국은 러시아-투르크의 대립과 더불어 발칸 지역 문제까지 갖은 무력 충돌과 작은 규모의 전쟁을 계속했다. 결국 1890년대에는 에게 해와 지중해 해안의 섬들을 두고 영토 분쟁을 계속했으며 제1, 2차 세계대전과 터키의 독립전쟁 등을 거쳐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The region of Istanbul and neighboring Greece, which is connected to Europe, as well as the Anatolian Plateau, which we call Asia Minor, were once under the influence of the Roman Empire, and after the separation of East and West Rome, they belonged to the Byzantine Empire, which is known as East Rome. The Seljukturk Empire, the Loom Sultanate, and the Ottoman Turks were constantly at war with the Byzantine Empire in an endless feud with the Byzantine Empire at the dawn of the Byzantine Empire. In particular, the Byzantine Empire was defeated at the Battle of Manzikert in 1071, Constantinople was violated by the Fourth Crusaders in 1204, and the Ottoman Turks occupied Asia and the Balkans since the 14th century, completely destroying the Byzantine Empire in 1453. The entire Greek world, a descendant of Hellenism, was under Turkic control after the annexation of the Trebizond Empire. Despite several intermittent movements of independence, this period was classified as the worst dark era in Greece's history.
Compared with the modernized colonial empire, this Ottoman Turks' territorial policy cannot be compared on the same line. From the beginning, the Ottoman Turks had established themselves as a pre-modern empire. The Balkan and Greek regional policies implemented by the Ottoman Turks were divided into upper and lower administrative units. Usually, higher administration was governed by the central governors, and lower administration was carried out in the form of autonomy of local influential forces. As a result, until just before the Greek Revolutionary War, the Balkan regions were devoted to the Turks, and there were regions ruled by a Greek monarch, and Greek merchants and nobles, influential families in the region, played an important role. The pre-modern empires were in a similar state, but they were under the class rule of the Sultan of the Ottoman Turk Empire, and in particular, the status of the Ottoman Turks was divided into soldiers, bureaucrats, and clerics such as Askeri, commoners Rayah, and Kul, slaves. According to Osman Turk's law, not only Rayana Kul but also Askeri were suffering from the oppression of strict class rule because the sultan had the right to escape life and death. In the event of a rebellion within the Ottoman Turkic realm, the Ottoman Turks put down the rebellion equally harshly, regardless of who it was.
Warlords and influential local powers within the empire often self-governing, and they exert significant influence on the strong army and the local economy in the provinces. They had no choice but to brutally suppress the rebellion because neglect or rough handling could undermine the foundation of the Ottoman Turks. On the one hand, the Ottoman Turks discriminated against them by establishing a class system that divided the ruling and the ruling classes from a religious perspective rather than an ethnic perspective, as all pre-modern Islamic countries did. Discrimination was difficult to say at that time until the mid-15th century, when Ottoman Turks expanded and grew, but the level of discrimination changed after the 17th century, when Ottoman Turks began to suffer from financial difficulties. In particular, the number of indussees Jiya and Haraji, which were collected by Muslim dimmies, gradually increased, increasing the burden on non-Muslims, and those who failed to withstand such Turkic indus eventually led to sporadic rebellions. However, in the process of suppressing the rebellion, the Ottoman Turkic government began to inflict religious persecution.
The Ottoman government, which had tolerated the Orthodox Church to minimize opposition from the European Orthodox world, believed that the Orthodox Church was the spiritual center of the rebellion as the rebellion grew more frequent, and the Constantinople Patriarchs began to be expelled or murdered in Costantinye. The killing of infidels by ordinary Muslims led to impunity and social acceptance. As a result, a significant number of non-Muslims who could not endure persecution converted to Islam or fled to other countries, and as a result, many Orthodox intellectuals fled to Italy, and farmers and businessmen fled to Hungary, Germany, Russia, and Poland. As a result, Greece and the Balkans continued to decline, significantly decreasing in number, and the Patriarch Constantinople moved to Russia today. Most Greek Orthodox Christians in Cappadocia disappeared due to conversion or deportation by the 17th century, and the residents were replaced by Muslim Turks, and the Pontus regions along the Black Sea coast, such as Sinope and Trabzon, which were relatively influential by the Greeks, also accounted for the majority of Turks in the 18th century.
The Greeks remained segregated in Asia Minor during the Turkish-Greek War of the 20th century, with the exception of the Aegean Sea, where they were transferred to Greece as a result of the post-war population exchange, which completely wiped out the Greeks. Nevertheless, the Ottoman Turks remained very obsessed with the Balkans until the time of its collapse, presumably because they were the most densely populated and economically earned a lot of money from trading with European powers while facing borders with them. It is said that it was difficult to find anyone who was not from Greece or the Balkans when looking at the prime ministers and ministers who were appointed before the Ottoman Turks' decline. Until the era of Turkic nationalism in the 19th century, when the Pan-Turkish Union was established, it was difficult to define even the concept of Greeks living in the present Greek territory. At the time of the signing of the Treaty of Lausanne, an agreement was reached to exchange populations, but the ethnic division in the Greek region was only based on religion, not ancestry or region of origin.
In the Ottoman Turks, all peoples who believed in the Eastern Orthodox Church in the Balkans were called "Rum," meaning Roman, and the Greeks also called themselves "Romey" (Ρ ομα ι ́ο). All of these meanings mean "Roman".
This originated from the use of the Byzantine Empire, which called its people "Roman" regardless of ethnicity, and in the days of the Byzantine Empire's existence, the word "Roman" was simply used as a "national" concept. It was changed to a "religious" concept because the absolute majority of the Byzantine people were Orthodox after the fall of the Byzantine Empire. In the Ottoman Turks, it was judged whether or not they were Roman only based on religion, regardless of ethnicity or mother tongue, so there was a time when not only Greeks but also Romanians and Bulgarians were all called "Rum" if they were Orthodox. Similarly, Muslims called Turks, Kurds, Albanians, and even converted Greeks all Muslims and were recognized as a concept of nationality.
The concept of ethnic minorities like modern Romania, Bulgarians, and Turks emerged because of the activities of South Slavic nationalists who were greatly inspired by it after Greek independence. The Greek government also assimilated ethnic Albanians and Orthodox Turkic residents living in mainland Greece after Greek independence as a result of its Greekization policy, but this should be recognized as a separate religious component. Greece finally gained independence in the early 19th century due to strong support from Western powers, including Britain, France, and Russia. Conflicts between Turkey and Greece have increased since then, and from the 1850s, the two countries have engaged in armed conflicts and small wars over the Balkan region along with Russia-Turk confrontation. After all, territorial disputes over islands off the Aegean and Mediterranean coast persisted in the 1890s, and even after 100 years of World Wars I and II, Turkey's War of Independence, it remains an unsolved task for 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