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김남주 시인 30주기...2월 17일 광주 망월묘역에서 추모제

이승철 시인 | 기사입력 2024/02/14 [10:47]

▲생전의  김남주 시인.  ©브레이크뉴스

지난 1994년 2월 13일 새벽 2시 30분 김남주 시인이 ‘49년’ 생애를 마치고, 서울 서대문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620호실에서 타계했으니, 오늘이 바로 제30주기 되는 날이다.

 

내가 김남주(金南柱)라는 이름 석 자를 처음으로 안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시해 당하기 2주 전쯤인 1979년 10월 9일이었다.

 

구자춘 내무부장관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이라는 대규모 반국가조직을 적발했다고 발표했고, 도하 각 신문 정치면과 사회면의 톱기사로 보도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반유신, 반독재 투쟁의 일환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계하여 용공조작을 자행했던 것이다(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조직원 중의 한 사람인 이재오는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재직중이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체포, 구속된 수십 명의 사람 중에서 유독 ‘김남주’라는 이름이 내 눈을 잡아끌었다. 왜냐하면 그의 직업이 ‘시인’이었고, ‘남민전 보급투쟁’의 일환으로 어느 재벌의 집을 털기 위해 ‘강도짓’을 했다는 한국일보 기사가 문청(文靑)인 내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신문지상에 언급된 ‘남조선’, ‘전사’, ‘민족해방’, ‘폭력혁명’, ‘북한 괴뢰와의 연계’, ‘지하조직’ 등의 단어들과 ‘시인’이라는 순결한 말이 서로 충돌하면서 나의 고정관념과 상식을 뒤흔들고 있었다.

 

남민전 사건에 대한 1, 2심 재판은 서울형사지법 법정에서 열렸다. 1980년 5월 2일의 1심 판결, 9월 5일의 항소심 판결에서 김남주 시인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9월 10일, 김남주 등 남민전 관련자 36명은 서울구치소에서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해 12월 23일, 대법원은 남민전사건 상고심을 기각함으로써 김남주 시인은 징역 15년형을 확정받았다.

 

김남주 시인은 임헌영 평론가, 안재구, 이수일 등 ‘남민전’ 관련자들과 ‘오송회 사건’으로 수감된 이광웅 시인, 강상기 시인 등과 함께 수형생활을 했다. ‘시베리아 냉동실’, 혹은 ‘납골당’이라고 불리는 광주교도소 특수 사동(舍棟), 0.75평의 특사에서 김남주 시인은 불퇴전의 투쟁의지를 불태웠다.

 

서울구치소에서 있을 때 김남주 시인은 누군가로부터 “광주에선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사람이 없다”며 광주항쟁 소식을 전해듣고서 철창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광주 소식을 들은 김남주 시인은 시혼(詩魂)을 불태웠다. 브레히트, 루카치, 네루다, 하이네, 푸시킨 등의 책을 독파했고, 간수(교도관) 몰래 옥중시 창작에 들어갔다.

 

1981년 어느 날부터 감옥에서 흘러나온 김남주의 옥중시는 침체에 빠진 재야 및 학생운동권에 큰 충격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의 옥중 시는 압제와 폭압의 5공 철권통치에 저항하는 해방과 자유의 언어였다.

 

그즈음 광주 송정리에 사는 文靑 조진태(시인. 현, 5.18기념재단 상임이사)의 집에서 나는 감옥에서 유출된 김남주의 시편을 은밀히 건네받아 읽을 수 있었다.<권력의 담>과 <학살> 등의 시편을 전율 속에서 읽고 또 읽었다.

 

5월항쟁 직후인 1980년 6월 2일, <전남매일신문>에 발표된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이후 그 어떤 시인도 감히 광주의 참상과 5·18의 진실을 말할 수 없을 때 김남주 시인은 옥중에서 혁명적 언어로 해방과 자유를 구사하여 우리시대 선지자가 되었다.

 

1982년12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광주에서 박선욱 조진태 정삼수 장주섭 김수 박학봉 박정모 이형권 장헌권 박정열 정봉희 박선정 등과 <광주젊은벗들> 시낭송 행사를 치른 후 1983년 11월에 나는 어느 여성과 함께 무작정 상경을 단행했다. 이후 박몽구 박선욱 시인의 도움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등단 후 나남출판사에 입사하여 출판 일을 배웠다. 이어 1984년 12월 19일 오후 6시, 채광석 시인의 주도로 서울 동숭동 대학로 흥사당 강당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약칭: 자실)가 5공정권의 탄압을 꿰뚫고, 재출범하자 회원으로 참여했다.

 

그날 5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자실의 <민족문학의 밤>이 열렸다. “김남주 시인을 석방하라! 신동엽 시인을 복권하라!”는 현수막이 강당에 내걸렸고, 백기완 시인의 강연이 피를 끓게 했다. 이어 ‘김남주 시인을 생각하며’라는 주제로 황석영 작가의 해남시절의 회고담이 있었고, 젊은 시인들이 김남주 대표시를 낭송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김남주시인 석방하라! 신동엽 시인 복권하라!”는 구호를 목청껏 외쳐댔다. 김남주 석방운동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그즈음 1984년 12월 초순에 청사출판사 편집장 이영진 시인의 주도로 김남주 첫시집 『진혼가』가 출간되었다. 그후, 1984년 12월 22일(토) 오후 7시, 광주 금남로 가톨릭센터 7층 강당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중문화연구회,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 등 4개 단체 공동주최로 <옥중시인 김남주 시집『진혼가』 출판기념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경찰은 행사장 입구를 원천봉쇄함으로써 출판기념회는  ‘장안회관’에서 약식으로 거행되었다.

 

첫 시집『진혼가』가 출간된 이후 옥중시집『나의 칼 나의 피』(인동, 1987)와 『조국은 하나다』(남풍, 1988) 등이 출간됨으로써 김남주 시인은 1980년대 민족문학운동의 상징이자, 시대정신의 구현자로 존재했다. 그의 시집은 1980년대 학생운동권 필독서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1987년 여름, 나는 서울 마포 아현동 남아현상가에 자리한 ‘인동’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이영진 편집주간과 함께 김남주의 두번째 시집『나의 칼 나의 피』를 펴내고자 극비리에 준비했다. 김남주의 옥중시를 공식 출판했을 때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 당시 사상범의 ‘옥중 집필’이 불허되었기에 ‘김남주’라는 이름으로 시집을 출판한다는 것은 출판사는 물론이거니와 저자인 김남주 시인이 큰 곤욕을 치를 수 있었다. 경찰과 안기부 등 공안당국의 탄압을 감수하면서 나는 김남주 제2시집 『나의 칼 나의 피』의 편집과 제작 작업을 극도의 보안 속에 진행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총무간사 채광석 평론가와 상의하여, 이 시집을 고은, 양성우 시인 편으로 출간키로 했다. 표지에 김경주 화가의 판화 ‘김남주 시인’ 초상화를 실었고, 고은 시인의 ‘서문’을 게재했다. 시집 뒤표지의 추천사로 문익환, 문병란 시인 등의 촌평을 받아 실었다. 그러고는 초판 5천부를 인쇄, 제본하여 산하출판사 소병훈(현, 민주당 국회의원) 대표의 출판사 창고에 임시로 보관해 둔 채 서점에 배포할 결정적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 무렵 전두환 정권이 시국사범의 석방을 검토한다는 뉴스가 언론에 오르내렸으나 ‘남민전’ 관련자에 대해선 석방을 고려치 않고 있다는 당국의 발표가 있었다. 그 소식을 접한 것은 시집 『나의 칼 나의 피』가 출판돼 산하출판사 창고에 1개월째 임시로 보관돼 있던 시점이었다. 이에 나는 이영진 시인과 상의하여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김남주 시집을 서점에 전격 배포키로 결정했다.

 

김남주 시집 출간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특히 『신동아』 전진우 기자의 기사가 주목을 끌었고, 몇몇 잡지에서 김남주 특집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언론의 뜨거운 관심과 조명 속에 시집『나의 칼 나의 피』는 전국 대학가 서점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당시 안기부는 출판사가 있는 남아현상가의 관리사무실에서 한 달 동안 잠복근무하면서 사찰 활동을 벌였다. 출판사 관계자를 구속하고 시집을 압수하려고 했으나 『나의 칼 나의 피』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자, 그 파장을 우려해 수사를 중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88년 김남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조국은 하나다』가 남풍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광주와 전주교도소에서 쓴 350여 편의 옥중시는 전두환 폭압체제와 미국식 민주주주의 허위와 가면을 벗겨내는 데 기여했다. 김남주의 옥중시편에 대해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은 “70년대의 한국문학을 김지하가 버텨냈다면, 80년대를 버티고 서 있는 것은 김남주다. 그의 시는 세월을 뛰어넘어 나의 굳어진 감성과 메마른 육신을 쑤시고 들끓게 한다. 김남주는 자신 몫의 희생을 자기시대의 역사에 아낌없이 헌납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1987년 6월항쟁 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9월 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전신)’로 확대 개편되었고, 이때에도 김남주 석방문제는 최대 이슈였다.

 

1988년 5월 4일, 광주 가톨릭센터 강당에서 <광주전남민족문학인협의회>, <광주전남민중문화운동연합>의 공동주최로 <옥중시인 김남주 석방결의대회>가 열렸고, 5월 10일에는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김남주 문학의 밤>이 개최되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김남주 시인을 옥중에서 해방시키고자 전력을 다했다.

 

또한 작가회의와 문협, 펜클럽 회원 등 문인 502명이 ‘김남주 시인 석방 촉구 탄원서’를 법무부장관에게 제출했다.

 

1988년 국제펜클럽 서울대회에 맞춰 9월 1일,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88서울민족문학제>를 개최하였고, 수잔 손택 등 세계 문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남주 석방을 촉구했다. 펜클럽 세계본부를 비롯한 미국과 일본 펜클럽 등이 정부 측에 김남주 시인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했다.

 

그런 노력에 힘입어 정부는 김남주 시인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태우 정권은 김남주 시인 등 남민전 관련자 전원을 ‘형 집행정지’ 조치로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1988년 12월 20일 밤, 나는 서울역에서 황석영 작가, 이영진 시인, 한겨레신문 조선희 기자와 함께 전주행 밤기차를 탔다.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된 지 무려 9년 3개월 만의 출옥이었고, 그 이전 <함성>, <고발> 유인물 사건의 수감기간까지 합하면 김남주 시인은 만10년이라는 기간을 옥중에서 보낸, 한국문학사상 최장기수(最長期囚) 시인으로 가석방된 것이다.

 

그리하여 1988년 12월 21일 오전 10시경, 김남주 시인의 어머니 문일님과 시인의 형님 김남식, 동생 김덕종,  약혼자 박광숙, 그리고 황석영, 김준태, 이영진, 박진관, 이승철, 박석무, 강인섭, 김상윤, 최권행 등은 전주교도소의 옥문을 깨고, 이제 막 석방되어 나오는 ‘김남주 시인’을 뜨겁게 환영했다.

 

그날 나는 김남주 시인(43세)을 처음 보았다. 반백의 머리칼, 작달만한 체구에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신념에 가득찬 목소리는 또렷하고도 단호했다. 김남주 시인은 석방 일성(一聲)으로 “천길 물속에서 겨우 빠져 나온 것같다.”고 밝히면서,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이어 그는 첫 일정으로 김상윤 김준태 조봉훈 등과 함께 광주 망월동 제3묘역을 찾았다. 윤상원 열사의 영정을 들고 5월영령들이 묻힌 망월동 묘역을 참배했다.

 

1989년 1월 29일 김남주 시인은 지선스님의 주례로 광주 문빈정사에서 남민전의 동지인 소설가 박광숙 신부와 화촉을 밝혔다. 이후 서울 목동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는 시선집『사랑의 무기』, 시집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 『이 좋은 세상에』 등을 연이어 출간했다. 아울러 전국 대학가와 재야의 각종 집회장에서 단골 인기연사로 초청되었다. 김남주 시인은 전국 대학가 초청강연에서 사자후를 토해냈고, 뜨겁게 풀무질된 말씀은 좌중을 압도했다. 말하자면 10년간의 옥독(獄毒)을 미처 풀어보지도 못하고 그는 운동의 한복판에 서 있어야 했다.

 

1993년 1월에 열린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총회에서 신경림 시인이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때 사무국장으로 선출된 나는 김남주 시인을 ‘상임이사’로 모시고 함께 활동했다.

 

당시 ‘문민정부’라는 이름으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섰고,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에 편승해 문단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언론은 민족문학의 위기를 거론했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새로운 문학의 흐름으로 부각되었다.

 

또한 1987년 7월 12일, 채광석 시인이 불의의 사고로 타계한 후 민족문학 진영은 동요하고 있었다. 동구권의 몰락과 소비에트 해체를 겪으면서 이른바 ‘1980년대 문학’을 잘못된 것인양 치부하는 풍토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 자지 마라 개똥벌레야/ 너 마저 이 밤에 빛을 잃고 말면/ 나는 누구와 동무하여 /이 어둠의 시절을 보내란 말이냐// 밤은 깊어가고/ 이윽고/ 동편 하늘이 밝아온다/ 개똥벌레는 온데 간 데 없고/ 나만 남아 나만 남아/ 어둠의 끝에서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한다.―김남주 시 「개똥벌레 하나」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자유와 해방을 노래했던 ‘전사(戰士) 시인’이 ‘개똥벌레’에 빌려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1980년대 문학의 대표주자로 추앙받던 그였기에 누구보다도 상실의 아픔이 컸을 것이다. 그때 김남주 시인은 “역사에 있어 위대한 것은 승리만이 아니다. 패배 또한 위대한 것이다”라는 말씀했지만, ‘개싸가지’ 없는 것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분노와 회한의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1993년 10월 어느 날 나는 서울 종로 5가 연강홀에서 개최된 <1993년 책의 해 기념ㅡ 김남주 시인과의 대화> 행사의 사회를 보기로 했다. 행사 시작 전 밥을 먹고자 식당에 들렀는데 김남주 시인은 숟가락도 들지 못한 채 몹시 괴로워하며 식당 한쪽에 그냥 누워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내일 당장 병원에서 진단을 받으시라고 말씀드렸다.

 

며칠 후 김남주 시인은 광주로 갔다. ‘빛고을 자연건강회’에서 단식과 자연식을 병행했고, 한방 치료로 원기를 회복하고자 노력했지만 차도가 없자 광주와 서울의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고, 그 결과 ‘췌장암’으로 판명되었다. 발병되면 누구라도 3개월을 채 넘기기가 힘들다는 몹쓸 병마가 그의 육신을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모든 활동은 김남주 시인의 회생에 초점이 맞춰졌다. 전국 각지에서 수천만 원의 투병기금이 답지했다. 시인은 경희대 한방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서울 서대문의 고려병원(현재, 강북삼성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로 투병생활을 계속했다. 그해 12월 23일에는 조속한 쾌유를 비는 <김남주 문학의 밤>이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 강당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1994년 새해가 밝았다. 때론 병세가 호전되는 기미를 보이다가 다시 혼미상태로 빠졌다. 그때의 투병일기를 보면 극심한 고통으로 그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 수 있다.

 

문익환 목사님께서 노구를 이끌고 김남주 시인의 병실을 찾아 기(氣) 치료를 해주곤 했다. 그러던 1994년 1월 18일 밤에 재야운동의 거목, 문 목사님께서 돌연 심장마비로 타계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1994년 1월 22일, 문익환 목사의 <겨레장>이 엄수되었다. 김남주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병세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몇 번 고비가 있었지만 초인적 의지로 잘 버텨냈다. 투병생활이 어느덧 3개월째를 넘어서고 있었기에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지 가슴을 졸였다.

 

하루하루 노심초사하는 가운데 구정 연휴가 다가오고 있었다. 구정 연휴가 끝나고 초닷새인 2월 12일 저녁에 작가회의 문인들― 이시영, 강형철, 김영현, 강태형, 김남일, 현준만, 박선욱, 박정모 등 20여 명은 소설가 천승세 선생님의 생신을 맞아 강화 갈산리 자택에 모였다. 사모님이 준비한 거나한 잔치상 앞에서 우리는 생신 축하 술잔을 치고 있었다.

 

그날도 김남주 시인의 병세가 단연 화두였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김남주 시인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전갈이었다. 이시영 시인은 밥술을 뜨다 말고 황급히 고려병원으로 향했다. 곧이어 생일잔치에 모인 문인들도 고려병원으로 갔다.

 

1994년 2월 13일 새벽 2시 30분경, 김남주 시인은 이승에서의 삶을 뒤로 한 채 고려병원 620호실에서 타계했다. 향년 49세, 출옥 후 5년 만에 지상에서의 삶과 작별을 고해야 했다.

 

‘한 떳떳한 정신의 현현’이었고, 1980년대 ‘시대정신’의 표상이었던 김남주 시인! 우리는 그 육신의 소멸과정을 목격하고서 그의 몸속에 내장된 삶과 죽음에 대해 비감해 했다. “아, 이럴 수가!”라는 말을 되풀이하다가, ‘고인(故人)’으로 다가온 김남주라는 이름자 앞에 황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이승을 떠나가던 날 세상은 온통 하얀 수의를 걸쳐 입은 듯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김대중 선생을 비롯한 수천 명의 조문객이 빈소를 찾았고, 장례기간 동안 통곡이 이어졌다. 2월 16일 오전 8시, 경기대 민주광장에서 임헌영 평론가의 사회로 <민족시인 고 김남주선생 민주사회장> 영결식이 엄수되었다. 영결식 후 운구행렬은 서울 아현동의 작가회의 사무실을 거쳐 광주로 향했다. 이날 오후 늦게 전남대 ‘5월광장’에서 정동년 5·18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의 사회로 노제가 진행되었다. 김준태 시인이 만장시 「황토비」를 낭송했고, 황지우 시인은 “우리가 몸을 묻는 것이 아니라/ 별을 이 땅에 묻는 것이 되게 하라!/ 눈 녹아 봄이 오는 언덕 위로 찬연히 빛날/ 조국의 별을!”이라는 조시를 낭송해 조문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전남대학 노제가 끝난 후 장례행렬이 금남로에 진입하자 수백 명의 경찰병력이 운구행렬을 가로막았다. 한동안 경찰과 대치한 끝에 어둠이 내려앉는 시각이 되어서야 광주 망월동에서 하관식이 엄수되었고, 김남주 시인의 유해는 망월동 제3묘역 민주민족열사 묘지에 안장되었다.

 

문학평론가 김사인은 김남주 유고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창비, 1995)의 뒤표지 글에서 “김남주는 스스로를 소신공양함으로써 이 땅의 80년대를 버텨 세웠다. 저 지옥 같은 불구덩이 속을 알몸뚱이로 뒹군 그의 살타는 냄새에 기대어 우리 문학의 80년대가 구사일생으로 명을 보존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지난 2000년 5월, 제6주기를 맞아 광주 비엔날레공원에서 김준태 시인 등의 노고로 김남주 대표시 <노래>가 새겨진 시비가 세워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홍성담의 조각으로 건립된 ‘청송녹죽비’의 제막식이 있었다.

 

2010년 6월 8일, 전남대학교는 개교 58주년 기념식에서 김남주 시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김윤수 전대 총장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고인의 치열한 삶에 뒤늦게나마 조그만 위로의 표시가 되었으면 한다.”며 수여 배경을 밝혔다. 전남대총동창회는 고인을 모교의 명예를 빛낸 동문으로 선정, ‘용봉인 명예대상’을 수여했다.

 

*필자/ 이승철 시인. ©브레이크뉴스

2014년 2월, ‘김남주 제20주기’를 맞아 염무웅 임홍배 엮음으로『김남주시전집』(창비)이 간행되었고, 2015년 2월에 맹문재 시인이 『김남주산문전집』(푸른사상)을 출간함으로써 ‘김남주 문학’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2019년 5월 3일에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전남대 인문대 1호관에 <김남주 시인 기념홀>이 개관되었다.

 

지난 2022년 12월에는 김형수(현, 신동엽문학관 관장) 시인의 노작으로 『김남주 평전』(다산책방)이 간행되어 김남주 문학정신의 실체를 우리가 새롭게 재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매년 가을에는 <김남주기념사업회>(회장 김경윤)의 주최로 김남주 추모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민족시인, 민중시인, 혁명시인, 전사시인(戰士詩人)으로 일컬어지는 김남주 시인이 한국문학의 큰별로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본다.

 

오는 2월 17일(토) 오전 11시, <민족시인 김남주 제30주기 추모제>가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열린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시기를 소망한다.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The 30th anniversary of poet Kim Nam-ju's death... Memorial service held at Mangwol Cemetery in Gwangju on February 17th.

-Poet Lee Seung-cheol

 

At 2:30 a.m. on February 13, 1994, poet Kim Nam-ju passed away in room 620 of Korea Hospital in Seodaemun, Seoul (now Kangbuk Samsung Hospital) after 49 years of life. Today is the 30th anniversary of his death.

The first time I learned the three characters of the name Kim Nam-ju (金南柱) was on October 9, 1979, about two weeks before President Park Chung-hee was assassinated by the head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Minister of the Interior Koo Ja-chun announced that a large-scale anti-state organization called the South Korean National Liberation Front (Namminjeon) had been uncovered, and it was reported as a top article in the political and social sections of each newspaper in Doha.

The Park Chung-hee regime committed a communist operation by linking the democratization movement, which was developed as part of the anti-Yusin and anti-dictatorship struggle, with North Korea (Jae-oh Lee, one of the members of the organization arrested for involvement in this incident, currently serves as the chairman of the <Democracy Movement Memorial Association) is in progress).

However, among the dozens of people arrested and detained in this case, the name ‘Kim Nam-ju’ caught my eye. This is because his profession was a ‘poet’, and the Hankook Ilbo article that said he ‘robbed’ the house of a conglomerate as part of the ‘struggle to spread Namminjeon’ stimulated my curiosity as a literary scholar. Words such as ‘South Korea’, ‘warrior’, ‘national liberation’, ‘violent revolution’, ‘link with North Korean puppets’, and ‘underground organization’ mentioned in the newspaper clashed with the innocent word ‘poet’. It was shaking up stereotypes and common sense.

The first and second trials of the Nam Min-jeon case were held at the Seoul Criminal District Court. In the first trial ruling on May 2, 1980, and the appellate court ruling on September 5, poet Kim Nam-ju was sentenced to 15 years in prison. On September 10, 36 people related to Namminjeon, including Kim Nam-ju, were transferred from Seoul Detention Center to Gwangju Prison. On December 23 of that year, the Supreme Court dismissed the appeal of the Nam Min-jeon case, and poet Kim Nam-ju was sentenced to 15 years in prison.

Poet Kim Nam-ju served time in prison along with critics Lim Heon-yeong, Ahn Jae-gu, and Lee Soo-il, and others involved in the ‘Namminjeon’, as well as poets Lee Gwang-woong and Kang Sang-gi, who were imprisoned for the ‘Osonghoe Incident.’ Poet Kim Nam-ju burned his will to fight without giving up in the special 0.75 pyeong special building of Gwangju Prison, called the ‘Siberian freezer’ or ‘charnel house’.

While he was in a detention center in Seoul, poet Kim Nam-ju heard the news of the Gwangju Uprising, saying, “In Gwangju, there is no one who doesn’t cry from one door to the next,” and he cried endlessly, clutching the iron bars. Poet Kim Nam-ju, who heard the news about Gwangju, burned his poetry spirit. He read books by Brecht, Lukács, Neruda, Heine, and Pushkin, and began writing poetry in prison without the knowledge of his prison guards.

Kim Nam-joo's prison poetry, which was released from prison one day in 1981, brought great shock and vitality to the stagnant opposition party and student movement.

His prison poetry was a language of liberation and freedom that resisted the five-point iron fist rule of oppression and oppression.

Around that time, at the home of Muncheong Cho Jin-tae (poet, currently executive director of the May 18 Memorial Foundation), who lived in Songjeong-ri, Gwangju, I was secretly handed over and read Kim Nam-ju's poems that had been leaked from prison. Psalms such as <The Wall of Power> and <Massacre>. I read and reread it with trepidation.

On June 2, 1980, immediately after the May Uprising, poet Kim Jun-tae’s “Ah, Gwangju!” was published in the Jeonnam Maeil Shinmun. After that, when no poet dared to speak of the horrors of Gwangju and the truth of May 18, poet Kim Nam-joo became a prophet of our time by speaking of liberation and freedom in revolutionary language from prison.

From December 1982 to October of the following year, after holding a poetry recital event for <Gwangju Young Friends> with Park Seon-wook, Jo Jin-tae, Jeong Sam-soo, Jang Ju-seop, Kim Soo, Park Hak-bong, Park Jeong-mo, Lee Hyeong-kwon, Jang Heon-kwon, Park Jeong-yeol, Jeong Bong-hee, and Park Seon-jeong, I went to Seoul in November 1983 with a woman. did. Afterwards, with the help of poet Park Mong-gu and Park Seon-wook, he was able to show his face in the literary world. After making his debut, he joined Nanam Publishing Company and learned publishing. Then, at 6 p.m. on December 19, 1984, under the leadership of poet Chae Gwang-seok, he participated as a member of the Free Practicing Writers' Council (abbreviated as Jasil) at the auditorium of Heungsadang, Daehak-ro, Dongsung-dong, Seoul, after overcoming the oppression of the 5th Project Rights and re-launching. .

That day, Jasil’s <Night of National Literature> was held with about 500 people gathered. “Release poet Kim Nam-ju! A banner saying “Reinstate poet Shin Dong-yup!” was hung in the auditorium, and poet Baek Ki-wan’s lecture made the blood boil. Next, there was a reminiscence of author Hwang Seok-young’s time in Haenam under the theme of ‘Thinking of poet Kim Nam-ju,’ and young poets recited representative poems by Kim Nam-ju.

The people gathered there shouted with one voice, “Free poet Kim Nam-ju!” They shouted the slogan “Reinstate poet Shin Dong-yup!” The movement to release Kim Nam-ju had finally begun.

Around that time, in early December 1984, Kim Nam-joo's first poetry collection, 『Requiem』, was published under the leadership of poet Lee Young-jin, editor-in-chief of Cheongsa Publishing. Afterwards, at 7 p.m. on Saturday, December 22, 1984, at the auditorium on the 7th floor of the Catholic Center in Geumnam-ro, Gwangju, it was jointly hosted by four organizations, including the Free Practicing Writers' Council, the People's Culture Movement Council, the People's Culture Research Society, and the Jeonnam Democratic Youth Movement Council. A commemorative event for the publication of prison poet Kim Nam-joo’s poetry collection “Requiem” was scheduled to be held. However, the police blocked the entrance to the event venue, so the publication ceremony was held in an informal manner at the ‘Jangan Hall’.

After the publication of her first collection of poems, “Requiem,” and other collections of prison poetry, “My Sword, My Blood” (Indong, 1987) and “The Fatherland Is One” (Nampung, 1988), poet Kim Nam-joo became a symbol of the national literary movement in the 1980s. It existed as an embodiment of the spirit of the times. His poetry collection was extremely popular as a must-read for student activists in the 1980s.

In the summer of 1987, while working as the editor-in-chief of ‘Indong’ publishing house located in Namhyeonsangga, Ahyeon-dong, Mapo, Seoul, I prepared in extreme secrecy to publish Kim Nam-joo’s second poetry collection, ‘My Sword, My Blood’, with editor-in-chief Lee Young-jin. When Kim Nam-ju's prison poetry was officially published, a great risk had to be taken. At that time, Sasangbeom’s ‘writing in prison’ was not permitted, so publishing a collection of poems under the name ‘Kim Nam-ju’ could have caused great embarrassment not only to the publisher but also to the author, poet Kim Nam-ju. While enduring oppression from public security authorities such as the police and the National Security Agency, I carried out the editing and production of Kim Nam-joo's second collection of poems, “My Sword, My Blood,” under extreme security.

In consultation with critic Chae Gwang-seok, secretary general of the ‘Free Practicing Writers’ Council,’ it was decided to publish this collection of poems in editions by poets Go Eun and Seong-woo Yang. The cover featured a portrait of ‘poet Kim Nam-ju’, a print by artist Kim Gyeong-ju, and a ‘preface’ by poet Go Eun. As a recommendation on the back cover of the poetry collection, I received commentary from poets Moon Ik-hwan and Moon Byeong-ran. Then, 5,000 copies of the first edition were printed, bound, and temporarily stored in the warehouse of the affiliated publisher So Byeong-hoon (currently a member of the Democratic Party of Korea), aiming for a critical moment to distribute them to bookstores.

At that time, news was circulating in the media that the Chun Doo-hwan administration was considering the release of criminals of the current situation, but there was an announcement by the authorities that they were not considering the release of those involved in the ‘Namminjeon’. When I heard the news, the poetry collection 『My Sword, My Blood』 had been published and had been temporarily stored in the warehouse of an affiliated publishing company for a month. Accordingly, in consultation with poet Lee Young-jin, I decided to distribute Kim Nam-joo's poetry collection to bookstores regardless of the risk.

News of the publication of Kim Nam-joo's poetry collection was reported in the media.

In particular, an article by reporter Jeon Jin-woo of 『Shindonga』 attracted attention, and several magazines even published special articles on Kim Nam-joo. With great interest and attention from the media, the poetry collection “My Sword, My Blood” became a bestseller at university bookstores across the country. As I heard later,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at the time conducted surveillance activities by working undercover for a month in the management office of the Boy Phenomenon, where the publisher was located. He tried to arrest the publisher and confiscate the poetry collection, but when 『My Sword, My Blood』 attracted media attention, he heard that he stopped the investigation for fear of the repercussions.

In 1988, poet Kim Nam-joo's third collection of poems, 『The Fatherland is One』, was published by Nampoong Publishing. The 350 or so prison poems written in Gwangju and Jeonju prisons contributed to stripping away the lies and masks of Chun Doo-hwan's oppressive regime and American-style democracy. Regarding Kim Nam-ju's prison poems, literary critic Yeom Moo-woong said, "If Kim Ji-ha survived Korean literature in the 70s, it is Kim Nam-ju who survived the 80s. His poetry transcends time and makes my hardened emotions and dry body ache and boil. “Kim Nam-ju generously contributed his share of sacrifices to the history of his time,” he said.

After the June Struggle in 1987, the <Free Practicing Writers' Association> was expanded and reorganized into the <National Writers' Association> (currently, the predecessor of the Korean Writers' Association) on September 17, and even at this time, the issue of Kim Nam-ju's release was the biggest issue.

On May 4, 1988, the <Resolution Rally for the Release of Prison Poet Kim Nam-ju> was held at the auditorium of the Gwangju Catholic Center, co-hosted by the <Gwangju-Jeonnam National Writers' Council> and the <Gwangju-Jeonnam People's Cultural Movement Association>, and on May 10th, in Yeouido, Seoul. <Kim Nam-ju Literature Night> was held at the Women’s White House. The ‘National Literature Writers’ Association’ toured the country and did its best to free poet Kim Nam-ju from prison.

In addition, 502 writers, including members of the Writers' Association, the Cultural Council, and the PEN Club, submitted a ‘petition calling for the release of poet Kim Nam-joo’ to the Minister of Justice.

On September 1, in line with the 1988 International PEN Club Seoul Convention, the National Writers' Association held the <88 Seoul National Literature Festival> at the White Women's Center in Yeouido, Seoul, and called for the release of Kim Nam-ju, with world writers including Susan Sontag in attendance. The PEN Club World Headquarters, as well as the American and Japanese PEN Clubs, urged the government to quickly release poet Kim Nam-joo.

Thanks to such efforts, the government had no choice but to release poet Kim Nam-ju. The Roh Tae-woo administration announced that all those involved in the Namminjeon, including poet Kim Nam-joo, would be released as a ‘suspension of sentence execution’ measure.

On the night of December 20, 1988, I took a night train from Seoul Station to Jeonju with writer Hwang Seok-young, poet Lee Young-jin, and Hankyoreh reporter Cho Sun-hee. It was a whopping 9 years and 3 months since he was imprisoned for the 'Namminjeon' incident, and if you include the period of imprisonment for the previous <Crying> and <Accusation> handout incidents, poet Kim Nam-ju spent a full 10 years in prison, the longest period in the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He was released on parole as a poet.

So, at around 10 a.m. on December 21, 1988, poet Kim Nam-ju's mother Moon Il-nim, the poet's older brother Kim Nam-sik, younger brother Kim Deok-jong, fiancé Park Gwang-sook, Hwang Seok-young, Kim Jun-tae, Lee Young-jin, Park Jin-gwan, Lee Seung-cheol, Park Seok-moo, Kang In-seop, Kim Sang-yoon, and Choi Kwon-haeng went to Jeonju. They gave a warm welcome to poet Kim Nam-ju, who had just been released after breaking the prison gate.

That day, I saw poet Kim Nam-ju (43 years old) for the first time. Gray hair, a small body, dark skin, and a voice full of conviction were clear and firm. Poet Kim Nam-joo said in a single voice about his release, “It feels like I barely escaped from a thousand miles of water,” and shouted, “Free all prisoners of conscience!” Next, as his first schedule, he visited the 3rd Cemetery in Mangwol-dong, Gwangju, along with Kim Sang-yoon, Kim Jun-tae, and Jo Bong-hoon. We held the portrait of martyr Sangwon Yoon and visited the Mangwol-dong cemetery where the May spirits were buried.

On January 29, 1989, poet Kim Nam-ju married Nam Min-jeon's comrade, novelist Father Park Gwang-sook, at Munbinjeongsa Temple in Gwangju, with Monk Jiseon officiating. Afterwards, they settled down as newlyweds in an apartment in Mok-dong, Seoul. He successively published his poetry collection 『Weapons of Love』, poetry collections 『Let's Be Honest』, 『The Abode of Thought』, and 『In This Good World』. In addition, he was invited as a regular and popular speaker at various conference halls in universities and opposition parties across the country. Poet Kim Nam-joo gave a lecture at a university across the country and spoke of the lion's rear, and his passionate words overwhelmed the audience. In other words, he had to stand in the middle of the movement without even being able to shake off the poison of 10 years of imprisonment.

At the general meeting of the National Writers' Association (now the Korean Writers' Association) held in January 1993, poet Shin Gyeong-rim was elected as president. At that time, I was elected as the secretary general and worked with poet Kim Nam-ju as an ‘executive director.’

At that time, the Kim Young-sam government came into power under the name of the ‘civilian government,’ and cracks began to appear within the literary community, taking advantage of the fall of the real socialist bloc. The media mentioned the crisis of national literature, and postmodernism emerged as a new literary trend.

Additionally, the national literature camp was in turmoil after poet Chae Gwang-seok passed away in an unexpected accident on July 12, 1987. With the fall of the Eastern Bloc and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there was a culture of dismissing the so-called ‘1980s literature’ as if it were wrong.

“Don’t sleep, firefly/ If even you lose the light this night/ Who am I to be with/ to spend these dark days// The night deepens/ Eventually/ The eastern sky brightens/ The firefly Wherever I came, I went nowhere/ Only I remain, only I remain/ Greeting the morning that dawns at the end of the darkness. - From Kim Nam-ju’s poem “One Firefly”

It is significant that the ‘warrior poet’ who sang about freedom and liberation more passionately than anyone else expressed his feelings through ‘Firebug’. Since he was revered as a representative figure of literature in the 1980s, the pain of loss must have been greater for him than anyone else. At that time, poet Kim Nam-ju said, “The great thing in history is not only victory. Although he said, “Defeat is also a great thing,” he could not hide his anger and regret in a world where ‘bullshit’ and nonsense are rampant.

One day in October 1993, I decided to emcee the event <Commemorating the Year of the Book 1993 - A Conversation with Poet Kim Nam-ju> held at Yonkang Hall in Jongno 5-ga, Seoul. I stopped by a restaurant to eat before the event started, but poet Kim Nam-ju was just lying on one side of the restaurant in extreme pain, unable to even lift a spoon. I was shocked and told him to get diagnosed at the hospital tomorrow.

A few days later, poet Kim Nam-ju went to Gwangju. She combined fasting and natural diet at the ‘Bitgoeul Natural Health Society’ and tried to regain her vitality with oriental medicine treatment, but when there was no improvement, she was examined at hospitals in Gwangju and Seoul, and the result was diagnosed as ‘pancreatic cancer.’ He was suffering from such a severe illness that it would be difficult for anyone to survive more than three months once the disease began.

All activities of <National Literature Writers' Association> were focused on the revival of poet Kim Nam-ju. Tens of millions of won in disease-fighting funds came from all over the country. The poet received treatment at Kyunghee University Oriental Medicine Hospital and was then transferred to Korea Hospital (currently Kangbuk Samsung Hospital) in Seodaemun, Seoul. He continued to fight his illness with superhuman patience. On December 23 of that year, <Kim Nam-joo Literature Night> was held in the auditorium of the Women’s White House in Yeouido, Seoul to pray for a speedy recovery.

The new year of 1994 has arrived. At times, the condition showed signs of improvement, but then fell into a state of stupor again. If you look at his illness diary at that time, you can see how much he suffered from extreme pain.

Pastor Ik-hwan Moon used to lead his old man to poet Kim Nam-ju’s hospital room and give him energy therapy. Then, on the night of January 18, 1994, news broke that Pastor Moon, a major figure in the opposition movement, had suddenly passed away from a heart attack.

On January 22, 1994, Pastor Ik-Hwan Moon’s <Gyeorejang> was strictly observed. People who loved poet Kim Nam-ju were keenly aware of his condition, and although he had several difficult times, he persevered well with his superhuman will. As his battle with the disease had already passed its third month, he was anxious to see if a miracle could happen.

The Lunar New Year holiday was approaching as he was struggling day by day. On the evening of February 12, five days after the Lunar New Year holiday, about 20 writers from the Writers' Association - Lee Si-young, Kang Hyeong-cheol, Kim Young-hyun, Kang Tae-hyung, Kim Nam-il, Hyun Jun-man, Park Sun-wook, and Park Jeong-mo - gathered at the home of Galsan-ri, Ganghwa, to celebrate the birthday of novelist Cheon Seung-se. We were having birthday drinks in front of the banquet table prepared by her wife.

That day too, poet Kim Nam-ju's illness was a hot topic. Then, out of the blue, a phone call came. It was a message that poet Kim Nam-ju was in critical condition. Poet Lee Si-young left her meal and hurriedly headed to Goryeo Hospital. Soon after, the literary people who had gathered for the birthday party went to Korea Hospital.

At approximately 2:30 a.m. on February 13, 1994, poet Kim Nam-ju passed away in room 620 of Goryeo Hospital, leaving his life in this world behind. He died at the age of 49, five years after his release from prison, and had to bid farewell to his life on earth.

Poet Kim Nam-ju, who was ‘the manifestation of a proud spirit’ and a symbol of the ‘spirit of the times’ in the 1980s! After witnessing the process of death of his body, we were saddened by the life and death embedded in his body. While repeating the words “Oh, this can’t be right!”, I couldn’t hide my despair in front of a person named Kim Nam-joo who approached me as a ‘deceased person.’

On the day he left this world, the world was covered with white snow, as if he was wearing a white shroud. Thousands of mourners, including Kim Dae-jung, visited the funeral, and weeping continued during his funeral. At 8 a.m. on February 16, a funeral ceremony for the late national poet Kim Nam-ju, leader of a democratic society, was held at Kyonggi University's Democracy Square, presided over by critic Lim Heon-young. After the funeral, the funeral procession passed through the Writers' Association office in Ahyeon-dong, Seoul and headed to Gwangju. Late that afternoon, a tribute was held at the ‘May Square’ of Chonnam National University, presided over by Chung Dong-nyeon, standing chairman of the May 18 People’s Struggle Alliance. Poet Kim Jun-tae recited the full-length poem “Hwangtobi”, and poet Hwang Ji-woo said, “Let us not bury our bodies/ Let it be that we bury stars in this land!/ The stars of our homeland that will shine brightly on the hills where the snow melts and spring comes.” He touched the hearts of the mourners by reciting the condolence poem “!”

When the funeral procession entered Geumnam-ro after the end of the Jeonnam National University year of service, hundreds of police troops blocked the funeral procession. After a period of confrontation with the police, the funeral was held in Mangwol-dong, Gwangju only as darkness fell, and poet Kim Nam-ju's remains were buried in the Democratic Martyrs' Cemetery at the 3rd Cemetery in Mangwol-dong.

Literary critic Kim Sa-in wrote on the back cover of Kim Nam-ju's posthumous poetry collection 『If All Songs Disappear with Me』 (Changbi, 1995), “Kim Nam-ju survived the 1980s in this country by sacrificing his beliefs. “The 80s of our literature, relying on the smell of his burning flesh as he rolled around naked in that hellish fire pit, preserved his name with all his might,” he said.

In May 2000, to commemorate her 6th death anniversary, a monument engraved with Kim Nam-joo's representative poem <Song> was erected at the Gwangju Biennale Park through the efforts of poet Kim Jun-tae and others. There was an unveiling ceremony for the ‘Cheongsong Green Bamboo Monument’, which was built with Hong Seong-dam’s sculpture, attended by numerous people.

On June 8, 2010, Chonnam National University awarded an ‘honorary diploma’ to poet Kim Nam-ju at the ceremony commemorating its 58th anniversary. Former University President Kim Yun-soo revealed the background for the award, saying, “I hope that this will be a small, belated sign of consolation for the difficult life of the deceased, who tried to live with the pain of the times with all his being.” The Chonnam National University Alumni Association selected her as an alumnus who brought glory to her alma mater and awarded her the ‘Yongbongin Honorary Award’.

In February 2014, to mark the 20th anniversary of Kim Nam-ju's death, 『The Complete Works of Kim Nam-ju's Poetry』 (Changbi) was published by Yeom Mu-ung and Im Hong-bae, and in February 2015, poet Maeng Mun-jae published 『The Complete Works of Kim Nam-ju's Prose』 (Pureun Sasang). It is now possible to take a look at ‘Kim Nam-ju’s literature’ at a glance. Additionally, on May 3, 2019, <Poet Kim Nam-joo Memorial Hall> was opened in the first building of the College of Humanities at Chonnam National University, which was designated as a modern cultural heritage.

In December 2022, 『Kim Nam-ju Biography』 (Dasan Bookstore) was published through the hard work of poet Kim Hyeong-soo (currently, director of Shin Dong-yeop Literary Museum), allowing us to newly recognize the true nature of Kim Nam-ju's literary spirit.

And every fall, the Kim Nam-ju Memorial Literary Festival is held sponsored by the <Kim Nam-ju Memorial Association> (Chairman Kim Gyeong-yoon).

We see that poet Kim Nam-ju, who is called a national poet, a people's poet, a revolutionary poet, and a warrior poet, is still alive and breathing with us as a star of Korean literature.

At 11 a.m. on Saturday, February 17th, <The 30th Memorial Service for National Poet Kim Nam-ju> will be held at the Cemetery of National Democratic Martyrs in Mangwol-dong, Gwangju. I hope many people will join us.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119@breaknews.com
ⓒ 한국언론의 세대교체 브레이크뉴스 /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도배방지 이미지

  • Q.SUN 2024/02/14 [11:36] 수정 | 삭제
  • 내용이 좋네요
광고
광고
광고